여자와 남자는 가정법원에 앉아 있다. "모기 같은 존재죠.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데 아무리 때려잡아도 자꾸 나타나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보아 둘의 관계는 끝났다. 법원에서 숙려기간 30일을 통보받고 둘은 함께 차에 탄다. 남자는 평소 여자가 하지 말라고 했던 얄미운 행동으로 운전 중인 여자의 화를 돋운다. "죽을래"하고 여자가 소리치고 둘은 트럭에 치인다. 극적으로 기억만 잃는다. 둘은 증오했던 기억보다 설렜던 감정이 먼저 살아나서 사랑을 나눈다. 영화 <30일>의 줄거리다. S가 보자고 했다.
S와 나란히 앉아서 로맨스 영화를 본 게 언제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로맨스보다 액션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캄캄한 밤에 S랑 캔맥주를 마시며 부수고 때리고 죽이는 영화를 안주 삼곤 했다. 반년 동안 취향이 바뀐 걸까. 영화 인트로 장면에서 S의 옆모습을 힐끗 봤다. 옆통수에서 하얀 머리카락이 빛났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곧 반백이 될 정도였다. 눈가 잔주름이 선명해지고, 좁쌀 여드름이 올라와서 피부도 우둘투둘했다. 힐끗으로 시작된 시선이 뚫어져라로 바뀌자 S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쳐다봤다. "자기 한국영화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외모보다 안전한 질문을 골랐다. "자막 읽기가 귀찮네." S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아무래도 S는 지친 모양이다.
여자와 남자가 트럭에 치이는 장면에서 S가 말했다. "너랑 싸웠을 때 우리도 저렇게 트럭에 치이면 좋겠다 싶었어. 차라리 기억을 잃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S는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다.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S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30일>을 두 번째 보고 있었다. S의 답답함을 나도 안다. 거대한 검은 색깔 벽을 보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될 날은 영영 없을 줄 알았다. 이제야 까만 벽은 캄캄한 터널이었다는 걸 안다. 희미한 빛이 한 줄기 스미고 있으니까.
우리의 서사와 상관없이 여자와 남자가 지독하게 싸우는 장면을 보고 깔깔 웃었다. 술에 취한 여자가 공부하는 고시생 남자에게 키스를 시도하는데 남자는 "아가리 똥내"하며 밀쳐낸다. 어찌나 세게 밀쳐내는지 여자는 바닥에 널브러진다. 내가 보기엔 남자가 지나치게 잘 씻었다. S는 여자들은 좀 안 씻는 편인가 봐, 하고 말했다.
사실 둘의 싸움은 여자가 고시생 남자에게 “백수”라고 말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그렇다. 시작보다 싸우는 방식이 중요하다. 여자와 남자는 불에 기름을 부으며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대목은 우리의 서사와 상관이 있었다.
남자는 기억이 돌아왔고 여자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함께 집에 간다. 해피엔딩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싸움의 시작은 이혼이 아니었다. 네게 불만이 있어, 비슷한 말로 나를 충족시켜 줘가 있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우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가벼운 스킨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S가 주말 나들이를 갈 때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를 말하고 들으며 놀랐다. 다툼에 대한 서로의 반응을 인정하고 숙려시간의 규칙을 정했다. S는 내게 즉답을 요구하지 말 것, 나는 3일 이내에 대답할 것, 싸우더라도 부모 역할에 소홀하지 말 것. 어차피 화해할 사이라는 믿을만한 테두리를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