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허무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오면서는 비교적 오르막이 없어서 크게 힘든 줄 몰랐다. 날씨에 맞지 않게 둔한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뭘 입었나 유심히 살펴봤다. 그 사람들의 나이대는 어떻게 될까 추측해 보았다. 집 밖을 나선 게 2주는 넘은 것 같았다. 집안에선 언제나 아침에 잠이 깨면 추웠다. 창문을 열지 않아서 바깥공기가 어떤지 알 수도 없었다. 환기가 중요하다지만, 미세먼지가 더 무서웠다. 청소는 매일 하지도 않으면서 미세먼지가 떠 다니다가 내 코와 입을 통해 폐로 들어갈 걸 생각하면 숨조차 참고 싶어졌다.


10분 정도 거리의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했다. 이 날씨에 패딩 점퍼는 아무래도 오버였다. 지금이라도 얼른 점퍼를 벗어 들까 생각했지만, 길바닥에서 여행용 가방을 열고 옷을 넣고 빼고 하는 모양새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하철역 화장실부터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4월은 꽃가루와 콧물로 얼룩진, 말 그대로 잔인한 계절이었다. 뻘게진 눈으로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재채기까지 해대는 통에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봄이 사라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도 없고 파란 하늘이었다. 가을의 청명한 파란색은 아니었다. 그것보단 따뜻한 파란색이었다.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는 햇빛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이가 다 차서 가정은커녕 제 몸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처지가 서러웠던 건 아니었다. 그마저도 여행용 가방과 백팩에 2년여의 동거 살림이 다 담긴 채 제 발로 걸어 나와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만 하는 막막함도 아니었다. 어젯밤에 친하지도 않은 지인들에게까지 전화를 돌려가며 며칠만 신세를 지겠노라 염치없는 부탁을 해대던 처량함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선글라스를 꺼내어 숙인 얼굴에 걸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흐르는 눈물과 코끝에 맺히는 콧물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힘없이 풀고, 접어서 선글라스 아래 얼굴을 찍었다. 금세 휴지는 젖어서 손아귀에서 뭉쳐졌다. 나는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십 미터 앞에는 지하철 역 입구가 보였다. 더없이 밝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선글라스 아래로는 계속해서 물이 흘러 턱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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