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러 나서는 길이었다. 빌라 1층 공동현관 입구와 심지어 복도에도 A4용지에 프린트 된 안내문이 붙었다.
이거 읽어 봤어?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고, 그저 턱을 살짝 들어 벽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근시 특유의 가늘게 뜬 눈으로 벽을 훑었다.
되긴 되려나? 재건축. 이 블록엔 빌라들이 많아서 힘들 텐데...
나는 집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다. 어떤 집이 생활하기 좋은지 판단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거의 2년마다 갖은 종류의 주거 형태를 다 경험해보면서 자란 영향이었다. 하지만, 소위 돈이 되는 부동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그건 카인처럼 낙인 찍혀 이사다니던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빌라가 많으면 재건축이 왜 힘든데? 안내문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토지 면적에 비해 세대수가 많잖아. 사업성이 적으니 아무래도 시공사가 재미가 덜하겠지. 그는 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답을 했다. 난 반쯤 이해하면서도 백 프로만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젠장. 후딱 재건축 돼서 이 동네 떴으면 좋겠네. 지긋지긋해. 그가 눈을 종이에서 떼면서 재채기처럼 내뱉았다.
나는 2년마다 이사하던 어릴 때를 떠올렸다. 매번 어디로 이사가는 지 궁금했다. 내 방을 갖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한번은 집안 사정이 좋아진 탓인지, 운때가 맞은 건지는 몰라도 꽤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한 적도 있었다. 1층에 주인 노부부가 살던 빨간 벽돌 양옥집 2층은 아직도 한번씩 생각났다. 우리는 가장자리로 지나다닐 수 밖에 없었지만, 넓은 마당도 있었다. 학교 마치고 와서 옥상에 올랐다. 교회 첨탑부터 시작해서 온 동네가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잠기는 모습을 보았다. 동네의 어느 집이 다음에 우리집이 될 지 골라보곤 했다. 그러다가 캄캄해지거나 엄마가 저녁먹으라는 소리에 나는 내려갔다.
골목을 지나면서 늘어선 빌라들 공동현관마다 똑같은 안내문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뭐가 되긴 되려나보네. 내 입에서는 한숨처럼 말이 새어나왔다.
저래도 몰라. 저러다가도 십 년, 이십 년이 될지도 모르고. 또 후딱 진행될지도 모르고. 알 수 없어. 그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되면 어디로 가려고? 어릴 때 주기적으로 엄마에게 묻던 내 말과 모습이 순간 겹쳤다. 2층 양옥집에서 이사 나갈 때가 떠올랐다. 가구가 빠진 텅 빈 방에는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댔다. 텅 빈 모양새나 메아리치는 소리가 영 적응할 수 없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었다.
그와 나는 10년이나 같이 살고 있지만, 부부도 아니다. 그럼 애인 사이? 그러기엔 너무 차갑고 건조하다. 빌라처럼 그저 그 자리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재건축만 기다리는 그런 두 사람일 뿐이었다. 집은 그의 소유였다. 재건축을 하면 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테고, 어쩌면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따라가야 할까? 그도 그것을 원하는 걸까? 한번도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이야기 해 본 적은 없었다.
빨리 이사가고 싶어. 지긋지긋해.
그는 두 번이나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지긋지긋’이라고 말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어쩌면 재건축이 된다면 나는 지방에 부모님 댁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내 방은 고사하고, 잠도 부엌 에서 자야하는 그 집으로. 나는 얼른 내 짐이 얼마나 되는지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다 가져가도 둘 데도 없을테니까. 잠시 발끝을 쳐다보면서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미세먼지도 걷힌 맑은 봄날 하늘이었다. 눈이 닿은 하늘 아래로는 골목 끝까지 빼곡한 빌라들의 아우성에 귀가 먹먹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