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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 Jul 07. 2020

나는 누구 여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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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부

학번; 99212xxx

이름;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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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책장 하나 넘기지 않은 것이 확연한 빤짝빤짝한 경제학원론 책의 위쪽 단면에 저렇게 실명이 도장으로 떡하니 찍혀있다. 자세히 보니 원론 책뿐만 아니라 뭔가 도장이 찍힐 만큼 두께가 있는 책에는 다 저걸 찍어놓았다.


‘이건 뭐냐’ 

‘설마 도장을 돈 주고 판 거냐’


우리의 질타에도 동기 녀석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답한다.


‘내가 고등학교 내내 이게 얼마나 하고 싶었는데. 이걸 이렇게 어려워 보이는 책에 찍어서 들고 다녀야 지하철에 있는 여자애들이 내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를 알고 작업 확률이 높아진다고.’


나 좀 멋있지 않니? 응 아니야.


그리고 실제로 그 덕인지 아닌지 그 아이의 작업 확률은 높았다. 생각해보면 스무 살도 안되었을 시절, 무엇을 알았을 것이며 얼마나 철이 없었겠냐마는 사회에 대한 얄팍한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의 저 결정에 대해 그 동기는 지금은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동기들 모두 입학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일종의 특권 의식 같은 것에 어깨를 으쓱대곤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합격과 동시에 다들 집안의 자랑 거리가 됐고, 아직도 어떤 동네에는 합격과 동시에 현수막이 붙었을 것이고, 상다리 부러지게 잔치를 했고, 그가 다녔던 학원은 열심히 그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도 열심히 공부한 스스로에 대한 지난 몇 년간에의 보상심리가 작용했을 측면들도 있다. 


그렇지만 하늘 아래 뭐라도 된듯한 이런 성취감은 곧 첫 중간고사를 보고 팀 프로젝트들을 하고 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우리 학교에서는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제일이었는데 학교에 오고 보니 천재들이 넘쳐나고 있었더란 말이다. 게다가 쟤는 옷도 잘 입고 스타일리시하기까지 하고 쟤는 춤까지 잘 추고 쟤는 악기를 전공자만큼 잘 다루고 쟤네 집은 엄청 잘살기까지 한단다. 사회에 나와 부딪힐 현타에 비하면 아직 새발의 피이지만, 수능을 잘 보고 학교만 잘 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던 부모님의 말씀에 어랏 진짠가 하는 의구심이 비로소 처음 들기 시작한다. 


동아리 가입도 학회 가입도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없고 심지어 수강신청도 경쟁이다. 꽤나 열심히 공부한 과목도 왠지 성적이 중간이다. 심지어 성적을 아예 포기하고 내 인생에 F학점 가득한 성적표를 남겨보는 걸 목표로 하겠다는 선배는 옆반 선배가 F를 하나 더 받았다는 소식에 좌절한다.


서울대의 지리적 위치도 현타에 한 몫한다. 바위가 많고 험하기로 유명한 관악산의 한 자락에 처박힌 서울대는 캠퍼스 주변 환경으로 꿈꿀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위치에 있다. (지금은 좀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지만.) 교통도 불편해서 지하철 역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아는 사람은 알지만 서울대 입구역은 서울대 입구에 있지 않다……) 오전 첫 수업이라도 들을라치면 서울대 입구역에 내려 기나긴 셔틀 줄을 기다리거나 마을버스를 동동거리며 기다려 타고 언덕길을 올라 학교에 가야 한다. 터는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매해 신입생이 들어올 시기면 오다가다 길을 잃은 병아리들을 도와주는 것이 선배의 도이다. 강의 시간표를 짤 때는 다른 고려사항들에 더해 강의 동의 위치가 제일 중요한 요인중 하나인데 이는 그 생각 없이 시간표를 짜면 쉬는 시간 내에 다음 건물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학교의 건물들은 각 단과대별 높은 자존심을 대변하듯 제각각만 멋있어서, 함께 붙여놓고 보면 도무지 통일감이라고는 없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학교 앞에는 - 적어도 그 당시에는 - 주요 타겟층이 등산객인 포장마차 같은 것이 한 두 개 있을 뿐, 그나마 ‘유흥시설’에 가려면 다시 버스를 타고 신림동 쪽 녹두나, 서울대 입구 역으로 와야 하는데 그나마 별로 ‘힙’ 한 곳들은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종종 녹두 파니 서울대 입구 파니, 혹은 심지어 강남역 파니 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그룹을 나누곤 했다. 공강 시간이 생겨도 서울대 입구역 근처까지 내려와야 뭐라도 재미있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갈등과 (99학번 때만 해도 교문 앞에서 전경과 학생들이 깨진 벽돌을 던지곤 했었다) 너무나 갑자기 주어진 자유와 예전에는 묻지 않아도 되었던 수많은 질문들과 선택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묻게 된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어찌 보면 고등학교 시절 15시간씩 누군가가 미리 정해준 목표를 향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던 것은, 정작 그 시기에 내 삶의 주체적 주인으로써 물었어야 할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고민과 결정과 시행착오를 유예하는 비겁한 핑계였을 수 있다. 


이건 특정한 학교의 이슈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한국사회 교육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등학교 생활을 끝내고는 너무나 갑자기 모든 질문과 고민의 도가니에 던져지는 터에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은 혼란스럽게 끝나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시나 결론이 안 난 채로 대입 때 '성적에 맞게' '남들이 좋다는' 학교와 과를 정했듯이 이번에는 '스펙에 맞는 대로' '남들이 좋다는' 진로를 정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러고는 결국 내가 열심히 달리기는 했는데 과연 맞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애시당초 왜 이 달리기를 시작한 것인지에 대한 끝이 나지 않을 질문을 그제야 비로소 뒤늦게 시작한다. 


졸업 후 만난 외국 친구들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먼저부터 (미적분에 머리를 싸매는 시간 대신) 이 고민들을 길게 한 덕에 삶에 대한 자세와 결정이 훨씬 성숙한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된다. 중고등학교 때 이미 크고 작은 시도를 해보고 실수도 해보고, 그런 과정을 거쳐 내린 결정(Informed decision)을 토대로 진로를 정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활 동안은 그 결정을 수정하거나 좀 더 잘게 갈고닦아서 실제로 사회에 바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에는 정신적으로도 실제 역량으로도 좀 더 사회생활에 준비된 인재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군대를 제외할 경우 대학을 마치는 나이가 23-24세라고 칠 때, 고등학교와 대학교 7년이 그 출발선에 미치는 차이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지나치게 열심히 고등학교 생활을 한 끝에 글로벌한 관점에서는 30퍼센트 정도가 뒤쳐진 채로 출발선에 서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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