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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끼아또 Feb 22. 2023

잉여인간

별일 없는 어느 게으른 아침

 아직 어둑한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얼레벌레 도시락을 쌌다. 전날 밤 잠들기 전 둘째가 다음날 아침으로 꼭 만들어달라고 여러번 얘기한 요다 모양 팬케익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어찌저찌 애들을 등교시키고, 차가운 발을 데우기위해 슬쩍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더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쉽게 깨어지지않는 몸뚱이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못이기는척 일어나 대충 머리를 넘겨 묶고 거실로 내려와보니, 블라인드가 쳐지지 않은 창문을 통해 마루로 떨어지는 햇살이 무척 환하고 강렬하다. 내 기분과는 다르게 바깥 세상은 너무나 기쁘게 웃는것만 같았다. 내가 만약 영화속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의 모습과 이 배경화면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겠구나.. 잠시 기분이 멍해져 발걸음을 멈추고 햇빛이 마구 쏟아져 가득찬 뒷마당을 쳐다보았다. 그저께 내리던 비로 어제만 해도 뒷마당 끝 쪽에 물이 차서 땅이 질척거려 보였는데, 햇살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가 어느새 다 말라버린것 같다.

 날씨 핑계로 바깥을 보며 창문을 박박 긁어대던 브루노를 무시했던게 내심 마음에 걸려, 오늘 아침은 조금 더 길게 산책해줘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귀찮긴 하지만 잠시나마 브루노를 위하는 마음씨좋은 주인이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브루노와 집 앞을 나섰다.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넓은 잔디밭 한쪽으로 들어섰는데, 어제만해도 빗물로 불어나 작은 시냇물을 이뤄서 졸졸 소리를 내던 고랑이 벌써 바닥을 군데 군데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산속 개울을 만난것 같아 보기 좋았던 물들이 많이 사라지고, 그 밑에 잠겨있던 잔디의 머리들이 빼꼼 보인다. 마치 모내기 한 뒤에 물 위로 보이는 모종들처럼 삐죽삐죽 올라온 잔디의 모습이 좀 우습다. 

여기저기 코를 킁킁대며 냄새맡는 브루노의 발이 어느새 진흙 투성이다. 


아...괜히 이리로 왔네. 아직 흙이 마르지 않았는데, 저 햇빛이 너무 강해서 그만 속아버렸구나. 


 그래도 혹시나 싶어 목이 짧은 부츠를 신고 나온것은 잘한 일이었다. 까만 부츠 발등까지 튀어버린 물기와 진흙을 보며 부츠가 제역할을 다 하는것 같아서, 그리고 햇살을 보고도 부츠를 선택한 내가 대견해서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참 보람된 일일것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해본적도 없는 그 말이 요즘들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하나쯤은 있다'

..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그 말은 이 세상에 기여할 일이 없다면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소리일까..? 모두가 저마다 한 가지씩 의무를 가지고 잘 짜여진 톱니바퀴의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고서 자기 일을 해내고, 그 일들이 모두 맞물려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아가게끔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톱니바퀴 어느 곳에도 끼어있지 못하고 바깥에 덩그러니 서서 굴러가는 바퀴를 바라만 보고 있는 기분이드는것은 왜일까..  개개인이 해내고 있는 모든 작은 일들이 모여 시대를 만들고, 다음 세대를 이뤄내는데, 과연 그 안에 내가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는게 무엇일까? 아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행동들이 우리 역사에서 과연 꼭 필요한 것들일까? 간단히 무시되어도 전혀 무방한, 어쩌면 아예 없는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단어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잉여인간


...이거구나. 언제고 스치듯 들었던 말. 실제로 존재하는 말인지도 알수 없는 저 말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지.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믿었던 나인데. 여느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 산책시간에 저런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다. 

 갑자기 눈이 확 크게 떠지면서 동시에 가슴속에 뭔가 쿵 하고 내려 앉는 기분이 들어, 브루노 입가에 걸린 줄을 휙 잡아당겼다. 나무 밑둥에 새로 쌓아둔 비료에 코를 쳐박고 있다가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는 브루노 입가가 시커멓다. 들어가서 얼굴과 발을 물로 씻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길 건너 반대쪽 잔디밭으로 들어가본다. 

 아까 있었던 쪽 잔디밭과 비슷한 모양의 이쪽 잔디밭에도 반대쪽에서부터 이어진 고랑이 쭉 나 있다. 그런데 이쪽 고랑에는 아직도 어제처럼 물이 가득차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 내려간다. 희한하다. 중간중간 크고 작은 돌뿌리에 부딪쳐 돌아가며 내는 물소리가 듣기 좋다. 큰 돌뿌리에 부딪칠땐 큰 소리가, 작은 돌들을 돌아갈땐 작은 소리가. 졸졸 쪼르르 졸졸 쪼르르르.. 똑같은 물인데 속도도 소리도 다 다른 것이 한 줄기의 시냇물이 되어 흘러간다. 떨어지는 햇살이 물 표면에 부딪쳐 와장창 부서지며 튀어 오른다. 이리저리 일정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반사되며 어느 한 줄기가 내 눈으로 튀어들어왔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마치 물고기들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맑은 물인데, 가만 들여다보면 한 마리도 없다. 원래 물이 흐르던 곳은 아니었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왠지 조금 서운하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때면 놀러가던 큰 이모네 집은 도시 외곽 산에 둘러쌓인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침만 먹고 나면 이종사촌 동생들과 마을 뒷편에 있던 냇가로 걸어가서 물장구도 치고, 그날 만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생각이 났다. 어른이 된 뒤에 들러서 보았더니 놀라울만큼 좁고 얕은 시냇물이었지만, 어릴땐 무척 넓고 깊게만 느껴졌었다. 물과 돌멩이, 그 속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떼와 소금벌레, 장구벌레.. 별것아닌 것들이 특별하게만 느껴지던 그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흐르는 물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변함이 없다. 아..변하지 않은게 있었네..? 


 문득, 저 반대편 잔디밭에서 느꼈던 우울감이 다소 날아가는 듯했다. 

내 옆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던 브루노가 어디서 난 용기인지 슬금슬금 물가를 향해 걸어간다. 브루노는 태어나서 저런 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겠지.. 몇 일전 2돌이 지난 브루노는 게으른 주인을 만난덕에 아직도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래도 겁을 내기 보다는 꼭 저렇게 한발 한발 다가가서 킁킁대며 얼굴을 갖다 대어보곤 한다. 몰라서 용감한 것인지, 두려움을 이겨내는 도전인것인지.. 얼굴이 물에 젖을까봐 목줄을 당기려다가 슬쩍 그냥 놔둬보았다. 너도 하고 싶은 것 한 두 개쯤은 할 수 있게 놔둬도 되겠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가에서 한 발을 들어 물을 만져볼까 말까 하다가,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보려고 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가자, 브루노"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왠일로 이 녀석이 내쪽으로 도로 걸어온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나보네. 그래, 나중에 다시 또 오자. 그때는 발 한 쪽이라도 물에 담궈볼까? 근데 혹시 저 햇살에 다 말라버려 물이 없으면 어쩌지? 좀 아쉽겠지만...비는 또 오겠지. 그럼 그때 또 기회가 있을거야. 


또 기회..

그러네. 어쩌면 내게도 다시 올지 몰라. 다시 한 번 용기내서 발을 내딛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볼수 있는, 그래서 문득 풍덩하고 뛰어들어 정신없이 누려볼 기회가 말이다. 그게 톱니바퀴 위가 되었든, 전혀다른 그 무엇이든.. 내가 브루노 너에게서 깨달음을 얻는 날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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