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스키어들의 천국 - Saas-fee 1

블랙피스트를 지나야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라자냐

by Melissa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스키 마을 중 하나인 사스페(Saas-Fee). 전 세계 스키 선수들이 여름에도 훈련하러 올 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그래서인지 내게는 괜히 더 멀게 느껴졌다. 실제로 거리도 멀다. 제네바에 살면 가까운 스키장이 많다 보니, ‘다음 시즌에 가봐야지, 실력이 좀 더 늘면 가야지’ 하며 계속 미뤄왔다. 그러다 이번에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드디어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스페는 해발 1,800미터에 자리 잡은 마을이고, 가장 높은 슬로프는 3,500미터에서 시작한다. 정상부터 마을까지 내려오면 거의 1,600미터의 고도차를 스키로 내려오게 되는 셈이다. 높은 고도 덕분에 오후 햇살이 내리쬐어도 눈 상태는 여전히 괜찮고, 모글도 많지 않다.

스키장이 워낙 넓어 리프트를 기다릴 일이 거의 없다. 아침에 시작할 때 한 번 줄을 서는 걸 제외하고는, 산 위로 올라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지니 줄 걱정 없이 마음껏 스키를 탈 수 있다.


사스페는 스키와 하이킹으로는 잘 알려졌지만, 체르마트처럼 일반 관광지로는 덜 알려져 있어 마을 자체는 작고 아담하다. 유명 브랜드 샵도 없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스위스 가족들, 그리고 스키어들이 주로 찾는 마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이 더 편안하고 좋다.


처음 스키장에 도착하면 코스를 익히기 위해 여기저기 지도를 보며 다양한 루트를 시도해 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루트를 찾으면 반복해서 타면서 익히게 된다. 어느 쪽이 더 가파른지, 어디에 사람들이 몰리는지 살피고, 점심은 어디서 먹을지, 아페로 스키는 어디서 할지 둘러보게 된다.


첫날 아침, 몸을 풀기 위해 중간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몇 번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장 높은 3,500미터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을 가기 위해선 곤돌라가 아닌 푸니쿨라를 타야 했는데, 스키를 벗고 다시 들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추위를 녹이고 다리도 쉬어가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여행에서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무언가 활동이 있는 여행. 구경만 하는 여행보다는 산에 가면 스키나 하이킹을 하고, 와인이 유명한 지역을 가면 와인메이킹 수업을 듣고, 이탈리아에서는 요리 수업을 듣는 식의 활동이 있는 여행을 선호한다.

둘째, 음식이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느니 차라리 굶는 쪽이다. 그게 아니면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다음 끼니를 제대로 먹는다. 그래서 식당을 고를 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꽤 까다로운 편이다. 제대로 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다.


스키장에서, 특히 산 위 레스토랑에서 괜찮은 식당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여러 곳을 시도해 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점심때마다 레스토랑을 바꾸는 것도 일이고, 내가 탈 수 있는 루트 안에 있어야 한다.


스키 둘째 날, 몸이 좀 풀려서 최정상에서 시작해서 중간에 블랙 피스트를 짧게 지나 마을까지 내려가는 루트를 선택했다. ‘블랙’이라는 색깔이 주는 심리적 부담 탓인지, 그 구간에 들어서자 매 턴마다 멈춰서 숨을 고르게 됐다. 그래도 이 길을 지나야만 내려갈 수 있었기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리고 그 끝에서, 사스페에서 가장 유명한 5성급 호텔인 The Capra 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마주했다. 긴장한 다리를 부여잡고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Laurent-Perrier 샴페인 로고가 적힌 DJ 부스와 파라솔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분위기만 화려한, 가격만 비싼 곳은 아닐까 싶어 지나칠까 고민했지만 이대로 안쉬고 내려가다가는 힘이 다 빠질 거 같아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해발 2,500미터에서 내려다보는 설산의 풍경, 맑고 시원한 공기, 거기에 무알콜 맥주 한 잔의 상쾌함까지 어우러져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내, 주문한 라자냐가 나왔다.


Mon Dieu! 내 인생 최고의 라자냐였다.

라자냐는 집에서도 만들 수 있어서 외식 메뉴로는 잘 고르지 않는 편인데, 아마 이날 라자냐를 주문한 이유는 탄수화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블랙 피스트를 지나 허기졌던 그 순간, 이 라자냐는 완벽했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보며 먹는 따뜻한 한 끼.

점심을 마치고 다시 마을로 내려가는 슬로프도 색깔만 레드였지, 내게는 꽤 도전적인 구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레스토랑의 식사를 생각하면 블랙 슬로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컨디션일 때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하면 되니까 말이다.

왼쪽은 Laurent-Perrier 로고가 씌여진 의자 오른쪽은 레스토랑 입구 전경
화살표로 표시한 구간이 그 짧은 블랙피스트 구간 - 보다시피 여길 거치지 않고서는 내려갈수 없다.

“먹기 위해 스키를 탄다”는 말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에게 스키는 맛있는 음식을 죄책감 없이 즐기게 해주는 운동이다. 그냥 아페로 스키만 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타는 편이 아닐까 싶다.


불어 표현 ‘Apres Ski(아페로 스키)’는 말 그대로 ‘스키 후’라는 뜻이지만, 보통 오후 4~5시쯤 마지막 스키 런을 마친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오는 사이사이에 있는 Bar 에서 DJ 음악에 맞춰 춤추고,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며 즐기는 파티를 의미한다. 이때 음주한 채로 슬로프를 타는 스키어들도 있어서 오히려 가장 조심해야 할 시간대이기도 하다.


나의 아페로 스키는 조금 다르다. 마을까지 안전하게 내려와서 아페로 스키로 샴페인 한 잔을 하고, 바로 스파로 가서 몸을 풀어주는 것. 그것이 나만의 스키 마무리다. 중간지점에서 아프레 스키를 하다가 자칫 마을까지 영영 못 내려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사스페로 꼭 다시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이 레스토랑 - Spielboden by the Capra

지금 이 글을 쓰며 다시 입안에 침이 고이는 걸 보니, 말 다 한 것 같다.


왼쪽은 라자냐를 기다리는 맥주, 오른쪽은 블랙피스트 끝에서 만난 나의 인생 라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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