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복을 입을까, 벗을까?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다. 새로운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며 ‘세상에 이런 모습도 있구나’ 하고 깨닫고, 기존의 생각의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리고 좋고 싫음이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보다, 다른 문화를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키우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알아갈 때,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스위스는 4개의 공용어를 쓰는 나라다. 지역마다 언어가 다른 것에는 제법 적응이 되었지만, 같은 나라 안에서도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 차이를 뚜렷하게 느낀 곳이 바로 스파 시설이었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알몸으로 마주하는 것도 어색했고, 온탕에서 몸을 불린 뒤 ‘이태리 타월’로 때를 미는 것도 어린 나에겐 귀찮게만 느껴졌다. 왜 하필 ‘이태리 타월’인지, 이태리를 여러 번 여행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직도 궁금하다. 목욕탕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다 씻고 나온 뒤 엄마가 사주신 요구르트나 바나나 우유였다. 그 시원함은 지금도 선명하다.
캐나다에 살때도 공중목욕탕은 물론, 한인이 운영하는 찜질방에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다 스위스에 와서 스파에 이렇게 집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호텔을 고를 때 스파 시설의 유무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특히 스키나 하이킹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뜨거운 사우나에서 몸을 데우는 순간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대부분의 스파 시설에는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 자쿠지, 그리고 휴식 공간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다. 간혹 실내외 수영장이 있는 곳도 있다.
스위스 불어권 스파에서는 반드시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사우나나 자쿠지에서도 수영복에 수건을 두른 채 있어야 한다. 반대로 독일어권 스파에서는 수영복 착용이 금지다. 수건만 두른 채 사우나에 들어가야 한다. 발레주(Valais)처럼 불어와 독일어가 함께 쓰이는 지역에서는 내가 지금 어느 언어권에 있는지 헷갈릴 때도 있는데, 스파만 가면 바로 알 수 있다.
사스페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전 동네 공공 스파센터 ‘Aqua Allain’을 찾았다. 이곳 역시 수영복 금지. 다행히 수건은 몸을 다 가릴수있는 것을 주기에 수건으로 몸을 칭칭 싸매고 입장했다. 수영복 금지라고 해도 대부분은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안을 활보한다. 사우나 안에서는 성별과 상관없이, 수건을 두르든 나체로 있든 각자 편한 대로 자연스럽게 있는다. 대신 자기 수건을 깔고 말이다. 최소 자기 땀은 자기가 딲는 에티켓. 이번이 첫번째 독일어권 스파가 아니라서 충격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서로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것도 아니고 다 그냥 사람 몸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건식 사우나에 앉아 땀을 빼고 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줄지어 들어왔다. 금세 공간이 꽉 차 옆 사람의 땀이 내 팔에 닿을 정도였다. 불편해 나가려던 순간, 긴 수염을 한 남자가 종을 치며 들어와 독일어로 무언가를 외쳤다. 그는 뜨겁게 달궈진 돌 위에 물을 부으며 온도를 높였고, 사람들은 묵묵히 앉아 땀과 함께 고요 속의 싸움을 이어갔다.
달궈진 돌에 물을 붓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외치는 의식이 몇 번 반복된 뒤, 사우나 안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쯤 되면 옆 사람의 땀이 내 몸에 떨어지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벗고 있든, 창문으로 보이는 멋진 설경도 상관없어졌다. 그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다만 누가 먼저 이곳을 나갈 것인지 두리번거리며 찾게 된다.
나는 이미 구석에 몰려 있어 나갈 수도 없었고, 괜히 먼저 나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경건한 분위기를 뚫고 일어나 주목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결국 조용히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온도는 점점 높아지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마침내 누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곧바로 눈짓으로 “Shall we?”를 전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자 다른 이들도 뒤따라 줄지어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물 샤워기로 달려갔다. 수건으로 가리던 것도 잊고, 그대로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그 순간의 해방감과 시원함은 지금도 또렷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우리가 경험한 것은 매일 열리는 사우나 명상 수업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공존하는 발레주 속 사스페는, 분명 독일어권이라는 것을.
한 나라 안의 두 문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 표지사진은 Aqua Allain 웹사이트에 나와있는 실내 사진- 동네 공공 스파센터도 호텔 못지않게 시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