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스럽다는 것- Pully

그림과 현실이 만나는 순간

by Melissa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계획에 없던 곳에서 우연히 마음을 빼앗길 때다. 특히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은 장소라면 그 순간은 더 특별하다. 가이드북에도, 블로그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을 마주하는 순간은, 마치 나만 아는 비밀을 발견한 듯 들뜨게 한다.


스위스는 체르마트, 인터라켄, 루체른처럼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관광지가 많다. 실제로 가보면 그 명성대로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그 화려한 이름들 뒤에는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들이 또 숨어 있다.


라보(Lavaux) 지역은 그런 마을들이 이어진 와인 산지다. 경사진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레만 호수와 알프스 산맥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 코끝에는 포도향이 스며든다. 그 길을 걷는 순간, 스위스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난다.




로잔 외곽에 자리한 퓨이(Pully)도 그중 하나다. 일요일 오후 나는 단지 호들러의 그림을 보러 이곳의 작은 뮤지엄을 찾았다가, 뜻밖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호들러 (Ferdinand Hodler)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레만 호수와 산, 하늘을 힘 있고 담백하게 그려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스위스스럽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세련되거나 화려하다기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자연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캔버스 위에 번진 푸른 호수와 하얀 설산,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넓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스위스라는 나라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뮤지엄은 마을 크기에 어울리게 아담했다. 전시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복잡하거나 번잡하지 않았다. 호들러뿐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 스위스 화가들의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풍경과 일상을 담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느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르지만 풍경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함없었다.


왼쪽 사진은 아담한 뮤지엄, 오른쪽 사진은 호들러의 대표작인 Le Grammont dans la lumière du matin, 1917
다른 스위스 작가들의 인물 작품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자, 방금 그림에서 본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오래된 돌담 너머로 포도잎이 살짝 흔들리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호수와 산, 파란 하늘이 그림 속 장면처럼 나타났다. 실제의 하늘은 그림보다 훨씬 넓고 강렬했고, 호수는 그림 속보다 조금 더 반짝였다. 그러나 두 풍경은 같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캔버스와 현실 사이를 오가는 듯한 기묘한 순간이었다.


날씨 좋은 오후, 포도밭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큼한 포도향을 실어 나르고, 건너편에는 몽블랑이 희미하게 보였다. 호숫가에 다다르자 작은 레스토랑들이 모여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샤슬라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샤슬라는 라보지역에서만 나는 특별한 포도품종이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포도밭에서 불어온 바람이 와인 향과 겹쳐지고, 호수 위로 비친 햇살이 눈부셨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골목길 사이로 멀리 보이는 레만호수와 알프스 풍경


여행자가 우연히 발견한 이 작은 마을 퓨이. 가이드북 어디에도 크게 소개되지 않지만, 내겐 보물 같은 발견이었다. 어쩌면 스위스의 진짜 아름다움은 알프스의 장대한 풍경보다, 이렇게 조용히 흐르는 마을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곳이 아닐까. 당분간 내게 평화로운 스위스의 일상을 떠올리라 한다면, 아마도 호들러의 작품을 본 뒤 천천히 골목을 내려와 그림 속 풍경을 마주하고, 퓨이에서 한 잔의 와인을 기울이던 그 오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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