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하여, 아니, 개라는 텅빈 캔버스에 비친 나에 관하여
밥 때가 되면 주섬주섬 밥을 챙긴다. 어떤 때는 밥과 반찬에 국을 끓여 먹고, 또 다른 어떤 날에는 슈퍼마켓에서 사온 냉면 육수에 삶은 국수를 말아 먹는다. 우리 집의 귀염둥이, 24개월차 강아지인 문도의 밥도 이때 함께 챙긴다. 강아지 밥은 개들의 이빨에 좋다는 딱딱한 오리맛 사료와 말캉하고 알갱이가 작아 기호성이 좋은 닭고기맛 사료를 섞은 것에 무가당 요거트를 한 큰 술 더한 것이다. 남편과 문도가 산책을 하고 들어오는 동안 나는 사람 밥과 강아지 밥을 챙긴다. 밥이나 국수를 그릇에 담을 때면 내 그릇에는 버릇처럼 적은 양을 담는다. 남편 그릇에는 1인분 정량을 챙긴다. 문도 밥도 그릇에 쏟아 붓는다. 요거트는 문도가 보는 눈 앞에서 따른다. 요거트를 좋아하는 문도는 요거트 뚜껑을 여는 소리만 들어도 (혹은 냄새일까?) 흥분한다. 우리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강아지도 밥그릇으로 향한다. 남편은 잊지 않고 문도 밥을 확인한다.
“또 이렇게 많이 펐어?”
문도 밥 얘기다.
나는 문도에게 밥을 조금만 주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문도는 우리 집에 온 지 두 달이 될 때쯤부터 사료에 관심을 잃었다. 그래서 문도가 밥을 먹게 하는 것은 우리의 (정확히는 나의) 24시간 당면 과제 같은 것이었다. 그냥 맨 사료만 주면 절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딱딱한 사료건 부드러운 사료건, 일단 첫 번째 그릇은 얼핏 잘 먹는 것 같아도 두 번째로 주는 때에는 칼같이 거부했다. 그래서 토핑을 시도했다. 갈은 간 가루, 무염 황태 가루, 강아지용 유산균과 비타민, 각종 요거트 (비건 요거트와 소 우유로 만든 요거트 모두 시도했다. 문도는 두유 요거트보다 소 우유 요거트를 훨씬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를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밥을 어떻게 줄 것인가에 관련해서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강아지 장난감 회사 중 콩이라는 회사에서 두 가지 형태의 간식 (사료) 급여 장난감이 나온다. 하나는 건사료와 약간의 간식을 섞어, 작은 구멍이 난 오뚝이 형태의 장난감 안을 채워주면 강아지가 코와 앞발로 장난감을 툭툭 쳐서 사료와 간식을 빼먹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운데가 텅 빈 고무 장난감에 사료나 간식을 넣고 얼려서 강아지가 이것을 붙잡고 녹여 먹는 방식이다. 역시나 두 가지를 모두 시도했다. 결론적으로는 두 번째 방식(얼려주는 방식)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때 우리는 사료와 요거트를 섞어서 얼려주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문도가 이것을 좋아한 이유는 얼렸거나 주는 방식이 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요거트를 좋아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료에 요거트를 부어주기 시작했다. 또 하나 알게된 것은 밥그릇에 사료가 아주 적게 있을수록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문도에게 밥을 많이 주는 것은 강아지의 식습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문도는 내가 밥을 산더미처럼 줄 때마다 밥그릇으로부터 도망을 간다.
또 하나 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간식이다. 나는 도무지 어느 정도가 적정한 양의 간식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가끔 간식 봉지의 뒷면에는 강아지 무게별 적정 간식의 양이 적혀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먹는 사료에 더하여 그만큼을 더 주어도 된다는 말인가? 두 가지 이상의 간식을 준다면? 그래도 표시된 그램 수만큼 먹여도 되는 것인가? 한참 봉다리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문도의 눈을 바라보면 까만 문도의 눈동자는 촉촉하고 애절하다. 나는 그냥 한 움큼을 쥐고 하나씩 강아지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다. 문도는 내 앞에 앉을 필요도, 앞발을 주거나 코를 동그랗게 말은 손가락 안에 넣지 않고도 간식을 얻어낸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준다. 남편이 그만하라고 말할 때까지.
이것은 남편과 내가 밥이나 간식을 먹을 때에 조금 더 심해진다. 우리는 절대 사람의 음식을 강아지에게 주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고 이를 잘 지키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기류를 먹는다거나, 짭짤하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먹을 때에 문도는 내 쪽을 바라보며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문도는 쌀밥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것은 문도가 어렸을 때, 그니까 우리가 인간 음식을 주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기 이전에 식탁에서 줄 수 있는 것이 쌀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도는 쌀밥을 작게 공처럼 뭉쳐주면 그것을 너무도 맛있게 먹는다. 밥이 강아지에게 영양학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지금도 가끔 남편이 보지 않을 때, 문도가 나의 눈을 바라보며 제발 한 번만 맛있는 것을 달라고 텔레파시를 보내면 밥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식탁에서 주기 시작하면 늘 달라고 보챌 테니까) 밥을 작게 퍼다가 호호 불어 먹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강아지에게 밥을 조금 덜 주고 간식도 포상으로만 주어야 한다고 가볍게 충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전문 훈련사들은 내가 이렇게 밥을 주는 것이 강아지의 식습관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맞는 말일 확률이 높다. 인간과 함께 사는 개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삶의 대부분을 의지해야 한다. 개들의 삶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형성되고 한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먹이는 일도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나도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먹고 먹이는 것이 내 마음속에서 가지는 의미가 간단하지 않음에 있다. 내 마음속에서 음식은 아주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며 배가 고프다 혹은 배가 부르다는 감정 역시 해석이 간단하지 않다. 나는 20대 내내 내 안의 허기와 욕망의 교차 지점에서 이를 나타내는 증표로 음식을 사용했다. 내가 지구에서 차지하는 용량을 줄여나감으로써 눈에 띄지 않고자 했으며, 그와 비슷한 정도로 존재하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욕망을 마른 몸으로 대체했다. 때로는 벌을 주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밥을 굶었다. 수년간 지속된 이런 식습관은 54kg이었던 나를 48kg으로, 43kg으로, 다시 38kg으로 만들었다. 저체중에서 정상체중으로 올라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나는 문도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개에게는 이 세상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복잡하고 추상적이지 않다. 개들의 세상은 덥고, 춥고, 배부르거나 배고프고, 먹고 싶고, 졸리고, 매우 간단한 좋고 싫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세계는 물질적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문도의 밥그릇에 사료를 쏟아 붓는다. 원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많은 간식을 준다. 문도에게 음식을 잔뜩 가져다 바치는 것이 스스로에게 사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쿠팡에 강아지 간식을 검색한다. 강아지의 눈을 바라보며 "배고프지? 지금 밥 줄게." 라고 이야기한다. 문도의 눈은 그냥 까맣고 반짝일 뿐이다. 거기에는 사회적으로 또 가정 안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라든가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다가 자신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기로 결정하는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비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귀여운 개가 배고픔을 모르고 자라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러하다. 음식과 건강한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문도가 음식과 맺는 관계는 아주 단순하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는 아직도 내 밥을 담을 때에는 반 공기 넘게 채우지 못한다.
요가를 직업으로 하면서 나는 언제나 두 개의 교차되는 생각에 시달린다. 하나는 나 스스로가 마케팅의 대상이며 멋진 몸과 늙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스크린과 스크롤 사이에서 잘 큐레이팅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수련자로 바라보며 요가와 진지한 관계를 맺어야 할 뿐 내가 무엇인가를 대변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마음이다. 정답은 당연히 후자임을 알지만 전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두 가지는 언뜻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완전히 양립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식이장애를 극복했다고 생각한지 어언 8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을 상벌의 대상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원하는 만큼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든가 (대개의 경우 '오늘 수련은 엉덩이가 무거웠다'는 표현을 쓴다) 명상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더부룩한 느낌이 들면 순간적으로 다시 식이장애를 가졌을 때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간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고 먹는 음식의 종류도 각박하게 제한하며 칼로리를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1인치 단위로 재단하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완벽한 몸을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아본다. 그리고 과거 식이장애를 가졌으나 마르고 "예뻤던" 나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아지에게 간식을 준다. 많이.
캐럴라인 냅은 <개와 나>에서 뉴욕 동물 병원의 상담부장 수잔 코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누군가 개의 행동에 인간적 해석을 한다면, 바로 그 지점을 탐색하면 됩니다. 그건 개하고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무얼 생각하는지, 무얼 희망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얼 느끼는지 말해주지요."
지금 나는 하루 두 끼의 건강한 식사를 하고 얼마 전부터는 다시 고기를 먹지 않는 삶으로 돌아갔다. 하루 두 시간 정직하게 땀을 흘리며 요가 수련을 이어나가고 세 시간은 수업에 에너지를 쏟는다. 나의 몸은 아주 건강하고 식이장애를 가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 때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안다. 이것은 많은 여성들이 가지는 다이어트 강박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자신의 몸을 상품화 및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때때로는 강아지에게 간식과 사료를 퍼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고 한발 물러서 나를 고요히 바라보는 경험 역시 어디에서든 할 수 있다. 심지어 내 식탁을 바라보는 강아지의 절박한 눈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