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책으로 뭘 할 수 있을까? - 활동하는 독서가들에게
이 장에서는 사물로서의 책을 갖고 놀 수 있는 잡다한 '장난'들을 소개한다. 여기서의 장난은 누군가를 놀리고 골려먹는 일이기보다는 별 의미없지만 재미로 해볼 수 있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나름 진지한 것까지 마음껏 시도해보면 좋겠다.
1) 기록하기
한때 내가 읽는 모든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된 글로 써내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실패했다. 책 하나 읽는데도 대여섯시간이 걸리고 기록까지 하려면 책읽기를 마무리하는데 2-3일 동안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독서록을 써야된다고 마음을 먹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책읽기 자체가 고난해졌다. 그냥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지나치게 신경써서 읽게 되고, 인용할 문장을 밑줄 치면서 미리 글의 모양을 상상하게 되니 피곤했다. 책읽기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리고, 쉽게 지쳤다. 내가 1년에 100권씩 읽는다고 치고, 앞으로 살날이 약 55년 정도 남았다면 나는 앞으로 5500권 밖에 못 읽는 셈이다.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기록하는 데에 이만한 수고를 들일 수는 없었다.
물론 다독이 언제나 옳고, 누구에게나 좋은 건 아니다. 누군가는 책 하나하나와의 만남을 더 깊이 느끼고 싶을 것이고 시간과 마음을 들여 서평을 쓰고 싶기도 할 것이다. 기록을 하는 데에는 정성이 필요하고 정성을 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다만 반드시 독서록,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강박은 가지지 않으셨으면 한다. 책읽기에만 집중할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빛나는 느낌이 있음을 잊지 않아주셨음 한다.
나는 독후감을 쓰지 않지만 책을 기록하고 있다. '노션'을 활용해서 내가 읽은 책의 제목, 읽은 날짜, 장르 정도만 구분해서 써넣는다.
매일매일 기록을 갱신하기보다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읽은 책들을 정산해 써넣는다.
각 페이지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가장 왼쪽에 표지 이미지를 삽입하고 (대체로 알라딘에서 가져온다), 첫인상과 끝인상을 나란히 써둔다. 책의 첫인상을 써두면 기록을 다시 볼 때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생각 외로 다방면에서 책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 수 있다. 끝인상은 독후감을 내 맘대로 짧게 압축해서 쓰는 것에 가까운데, 안 쓸때도 많다.
아래의 ? ! . 은 나만의 구분법이다.
?에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궁금한 것들을 적는다. 대체로는 문장단위로 떠오른 질문들을 적지만, 어려운 말이나, 새로운 개념어들을 쓰고 뜻을 밝혀놓기도 한다. ?에 적힌 질문들에 대한 답이 생기면 그 아래에 바로 적는다. ?는 새로운 글감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내가 책에서 놓치는 부분, 저자의 주장과 나의 생각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어 좋다.
!에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새롭게 알게된 것들은 적는다. 여기에는 내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다. 저자가 쓴 문장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 내 프레임 안에서 요약해 적기도 한다. 보통 !에 가장 많은 문장들이 담긴다.
.에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결심한 것들, 내가 만들어낸 생각들을 적는다. 실용서를 읽으면 .에 여러가지 다짐이 적히곤 한다. 또 학술서를 읽으면 저자의 주장과 근거를 바탕으로 나만의 가설을 써둔다.
?, !, .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를 수 있는 생각들을 잘 구분해서 정리할 수 있게 도와준다. 독서모임이나 세미나를 할 때도 이 구분법을 자주 활용한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을 구분하는 데에도 편리하고, 내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자리와 딛고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알려주어 유용하다. 대신 이런 식의 촘촘한 기록은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에만 쓴다. 모든 책에 다 적용하려 하면 피곤해서 못한다.
2) 공간 채우기
책은 부족한 높이나 비어있는 자리를 보충할 때 매우 유용하다. (농담이 아니라) 책은 냄비 받침으로 쓰기에 가장 괜찮은 사물이다. 종이로 되어 있어 냄비의 열을 받아내기 좋고 두께가 있기 때문에 식탁을 잘 보호할 수 있다. 적당히 높이를 만들어주어 국자나 젓가락을 쓰기에도 편하다. 게다가 책은 견고한 데 비해 값이 싸다! 내가 딱히 애정을 갖고 있지 않은 책이 굴러다닐 확률도 높은 편이니 구하기도 쉽다. 만약 냄비받침으로 쓸거라면 표지가 두껍고 식탁이 나무든 유리든 쉽게 밀릴 수 있는 패브릭 양장을 추천한다.
또 책은 무언가를 받쳐 올리기에도 좋은데, 나는 대학원을 다니다가 자퇴해서 미처 다 읽지 못한 김춘수 시, 시론 전집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다 쌓아올리면 대략 10cm 정도의 높이가 되는데 이 책들은 노트북 받침대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덕분에 목건강을 지킬 수 있게 되어 김춘수 시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작년에 이사를 할 때에 아파트 바닥이 약간 기울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실에 큰 책장을 놓는데 기울어서 생긴 빈틈을 무언가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사 직원 분께서 안 읽는 책 같은 거 없냐고 해서 전혀 읽을 일 없는 딱딱한 양장 책을 건네주었다. 그 책은 마침 직원 분이 원하는 딱 그만큼의 두께였고, 책장 뒤를 용감하게 밀고 들어가 책장이 더 기울지 않게 지금까지 안전하게 우리 집을 지켜주고 있다.
3) 분위기 즐기기
책만큼 지적허영심을 잘 충족시켜주는 아이템도 없다. 지하철이나, 공원이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어딘가 고독하고 멋져보인다. 보여주기 위해서 읽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읽기가 그렇게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마릴린 먼로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사진을 두고 당대의 '악플러'들은 '마릴린 먼로가 저렇게 어려운 책을 이해할리가 없다', '소품으로 들고있는 것'이라며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는 사실 독서광이었다는 사실로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기분을 내기 위해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쁜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그림인지 모르지만 시간 날 때 전시관에 들르지 않는가. 무슨 그림인지, 무슨 작품인지 잘 모르겠어도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 중에는 지적 쾌락, 지적 향상심이 있는데, 향상심은 허영심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를 시작하는 쌩양아치가 팀에 없어서는 안되는 클러치 플레이어로 성장하는 이야기(슬램덩크)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처럼, 허영심은 성장과 큰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다. 동시에 허영심으로만 독서를 해도 충분히 괜찮다. (다만 문화자본적으로 하위계급 취급을 받는 출판물을 읽는 사람을 혐오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