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책으로 뭘 할 수 있을까? - 활동하는 독서가들에게
책이 있는 곳으로 갈 때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하지만 학창시절 때 도서관에 대한 인상은 주로 '낡았다'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학교 도서관은 대체로 작고 장서량이 적었다. 공공도서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명은 쨍해서 책들이 시퍼렇게 보였고 벽은 허옇거나 누래서 지저분해보이기도 했다. 너무 조용해서 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도서관보다는 대형 서점을 더 자주 갔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형 서점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신간들이 깨끗하게 진열되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책은 사물이기 때문에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온라인 게임은 집에서 컴퓨터로 했을 때, 피씨방에서 했을 때의 경험 차이가 드라마틱하게 크지는 않지만 책읽기는 도서관에서 읽을 때, 교실에서 읽을 때, 지하철에서 읽을 때, 카페에서 읽을 때, 공간에 따라 읽기 경험이 훅훅 바뀌곤 한다. 통학/통근 시간이 긴 사람은 집에서는 절대 안 읽히는 책이 지하철에서는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간은 책을 다르게 정의하고, 독자는 특정 공간에 진입함으로써 책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공간들은 책을 더욱 새롭게, 웅장하게, 멋지게 만들어주는 곳들이다. (안타깝게도 이 장에서 e북은 '책'에 포함되지 않는다. 공간 속에 놓일 수 있는 사물은 종이책, 아니면 e북 단말기 뿐이기도 하고, e북을 공간화하는 아이디어를 아직까지 발견하지는 못했다. 더더욱 많은 e북과 공간 사이의 연계를 기대해보고 있다).
1) 지혜의숲 (경기 파주시 회동길 145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지혜의숲은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거대한 서재다. 지혜의숲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은 천장과 책장인데, 높이가 약 7.5m가 되어 숲이라는 이름에 절로 수긍하게 된다. 1관에는 개인이 기증한 책들이 꽂혀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들부터 헌책방에서 볼 법한 오래된 장서들도 가득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꽂혀있는 책들은 대부분 열람용이라기보다는 보관용에 가깝다고 한다.
2관은 출판사들의 기증도서와 널찍한 카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 인문, 어린이 책들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대부분이고, 한 벽은 신간도서로 채워져 있다. 지혜의숲에 비치된 도서들은 지혜의숲 안에서 자유롭게 꺼내어 읽을 수 있다. 다만 도서관이 아니기 때문에 대출은 불가능하다.
지혜의숲은 지지향이라는 숙박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지향 투숙객이 주로 이용하는 3관, 라운지가 있다. 3관에서는 1,2관보다 장서수는 적지만 강연을 위한 무대,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3관과 1,2관 사이에는 복도로 되어있는 전시공간이 하나 더 있고, '북소리'라는 이름의 서점도 있다.
지혜의숲의 장점은 어마어마한 규모, 압도적인 정경도 있지만, 어린이에게 친절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도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북카페는 세련되고 멋있기도 하지만 어린이도서를 함께 비치하는 경우가 드물다. 반면 지혜의숲에는 어린이 도서량이 성인 도서량과 비슷할 정도로 많고, 책을 읽을 공간도 충분하다. 지혜의숲 3층과 지하에는 책만들기 워크숍과 활자인쇄박물관 등이 있어 어린이들이 체험하고 놀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이 제공하는 편이다.
많은 장점 가운데 한 가지 단점은 자동차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접근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광역버스를 타고 오고갈 수는 있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 운 없이 걸치게 되면 배차간격이 순식간에 40-50분으로 늘어날 수 있으니 주의하자.
2) 정독도서관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48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서울시 교육청이 운영하고, 종로구 북촌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이다. (안국역에서 제일 가깝다). 장서량은 50만권 정도로 서울에서는 남산도서관과 쌍벽을 이룬다.
정독도서관은 가는 길이 무척 예쁘다. 안국역 6번출구로 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서울공예박물관의 넓은 터가 있고, 북촌 특유의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산책하기 좋다. 집 주변 작은 공공도서관은 건물만 있을 뿐 별도의 부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정독도서관은 건물 뿐 아니라 공원이 있어 넓은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길냥이들도 여럿 있다). 정독도서관 건물로 들어가면 입구와 출구가 여러 군데에 있어 자기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복잡해서 싫어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서관이 거대한 미로 같아서 더욱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독도서관은 공공도서관 중에서 유일하게 '청소년관'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관에는 청소년 도서들과 더불어, 문학 전집, 잡지, 대학 입시 자료 등이 배치되어 있고 청소년 및 부모와 상담할 수 있는 독서상담실과 독서 동아리 활동이 이루어지는 세미나실도 따로 두고 있다.
미국도서관협회가 90년대에 청소년 이용자가 급감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서관 내부에 어린이 이용자도, 성인 이용자도 아닌 청소년 이용자만을 위한 전용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던 걸 생각해보면 한국 공공도서관에서도 더 많은 청소년관이 개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양질의 청소년 도서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데 청소년 도서를 퍼뜨리고 알리는 속도도 맞추어졌으면 한다.
3) 소전서림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138길 23 지하1층)
도서관에 입장하는데 돈을 내야 한다면 어떨까? 일단 거부감부터 든다. 도서관은 당연히 공짜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전서림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깬,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유료 문학도서관이다. 소전서림의 책은 대출할 수 없고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큐레이션에 참여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소전서림은 도서관이나 서점이라기보다 사실 북카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소전서림은 그 어떤 공간보다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순백의 책장들과 벽이 책을 둘러싸고 있어 신비롭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과 천국을 합치면 이런 모습일까 싶다. 5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는 반일권이 3만원, 종일권은 5만원으로 입장료가 저렴하지는 않다. 방문했을 때의 개인적인 감상은, '돈 값 한다!' 였다. 고급 살롱이라는 아우라 안에 머물고 있다보면 독자로서의 내가 대우받는다는 기분이 났다. 좋은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있는 것만 같은? 소전서림 내부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고 싶다면 유튜브 채널 민음사tv의 "출판사 에디터의 책 읽는 삶 | 화진, 기현의 인생곡선 【말줄임표 EP22"(2020.2.25 업로드)를 보자. 습관처럼 방문하기는 어렵겠지만, 소전서림은 작가들의 강연을 자주 여는 편이니 행사를 신청하는 식으로 방문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