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도 푸른 하늘빛이었다. 박경리의 작품 토지의 배경을 따라 여행을 다녀오던 중에 광주에 있는 선인들의 묘역을 참배한 후였다. 줄줄이늘어서있는 묘비 위로 파랗게 펼쳐진 하늘, 그 하늘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저려 왔다. 날카롭도록 시린 하늘빛이 아직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무언의 항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조차 그냥 바라보기 민망했던 그날, 처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느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떠나기 싫은 곳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내일의 계획에 떠밀려 아쉽게 떠났지만 다시 오고 싶은 곳, 그런 날을 위해 여행 계획표 중에 비어 있는 하루를 만들어 놓았다. 호텔 예약도 기차 예매도 없이 하얗게 남겨 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하지만 아직 그곳이 어디가 될지는 우리도 아직 모르고 있다.
니스에서 거의 매일 기차를 탔다. 이제 니스 빌 역이 서울역처럼 편하게 느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방향 감각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황망하게 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절대 짧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를 정하고 기차를 탈 때와 달리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하려는 지금 정말로 나그네가 된 느낌이 들었다. 니스 빌 역에서 동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 에즈와 모나코와 그리고 망통으로 가게 되고 반대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 앙티브와 칸 멀리는 마르세유까지 갈 수 있다. 에즈와 모나코 칸과 앙티브는 이미 다녀온 여행지였고 마르세유는 앞으로 가야 할 여행지로 계획된 곳이다. 다녀온 여행지 중에 아쉬운 곳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미련이 남았다. 우리는 동쪽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니스에서 기차로 30여분을 달려서 프랑스의 남동쪽에 위치한 망통으로 왔다. 지형상 이탈리아와 근접해 있는 곳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국경을 넘어서 이탈리아 여행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어느 책에서 망통에 사는 유학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보다 물가가 싼 이탈리아로 자주 생필품을 사러 간다고 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정해진 곳이 없으니 어느 곳이나 마음이 이끌리는 곳에서 머물 예정이다.
망통에서 내가 처음 마주한 것은 파란 하늘이다. 역에서 내려 처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 것도 망통의 하늘이었다. 마치 빗 자락으로 쓸어 낸 듯한 구름 한 조각이 걸려 있는 하늘빛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발트블루였다.
노란 오렌지 색 건물들이 유난히 많은 망통의 시가지에는 가로수도 온통 오렌지 나무였다. 2월의 오렌지 축제가 끝나고 계절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가지에 오렌지가 달려있는 나무가 더러 있는 걸 보니 이 오렌지들은 가로수 과일로 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우리를 바닷길로 안내해 주고 있다.
오렌지 나무의 상큼한 그늘이 끝나는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바다와 하늘이 만나서 하나가 되어버린 탁 트인 공간에 꿈처럼 내가 서 있다. 끝없이 펼쳐진 망통의 푸른 하늘을 바라본 순간 우리가 머물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일 년 중 300일이 맑다는 망통의 기후. 그 하늘빛이 너무 좋아서 비어있는 우리의 하루를 이곳에서 채우기로 했다.
망통의 긴 해변가 붉은 파라솔 아래에서 홍합찜과 스테이크 그리고 로제 와인을 시켰다. 유럽의 돈 많은 노인들이 노후에 와서 살다가 이곳에 묻히기를 소망하는 곳, 오늘은 나도 그들을 코스프레해 본다.
프랑스 사람들은 세 시간씩이나 긴 식사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나같이 성급하게 식사를 하는 사람은 전혀 흉내조차 내 볼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은 이곳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식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하였다.
아직 휴가철이 아니어서 바닷가는 붐비지 않았지만 모래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뱃살이 두둑한 중년부부의 해바라기 하는 모습은 마치 바위 위에서 서로 등을 기대고 햇빛을 쬐고 있는 바다표범을 보는 듯하다. 기다란 모래성을 만들고 있는 아기와 엄마도 사랑스럽다.
와인잔 너머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뚱뚱한 남자가 내 와인잔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따뜻할 때 먹어치워야만 맛있을 줄 알았던 음식이 식은 후에 오히려 본연의 제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 앞에 놓인 홍합찜은 따뜻할 때 진했던 버터의 향이 사라지면서 쫄깃하고 고소한 홍합의 본 맛을 가져다주었다. 홍합 껍데기가 수북하게 쌓였다. 별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지 않은데 시간이 제법 흘렀다.
우리가 계획하는 여행은 조금 더 여유로울 줄 알았다. 하긴 어느 한 편을 포기하면 천천히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한 곳을 건너뛴다는 게 쉽지 않았다. 매표소 앞에 늘어선 관광객의 긴 줄을 피하기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서야 했고 미리 예매해 둔 기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뛰어야 했다. 낯선 곳에서 불안해하며 신경을 곧추세우는 일도 힘들었다.
오늘 하루 망통에서는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착하고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에 가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정직하게 사 먹을 수 있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는 우리 속담처럼 여행 중에 휴가를 받은 날을 천천히 여유 있게 즐기고 있다.
해변가에 있는 호텔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아침이면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뜨는 해를 맞이할 수 있다. 오렌지 축제가 열리는 2월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호텔 침대에 누워 일출을 바라보는 날이 일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망통에서는 날이 흐려서 일출을 볼 수 없으면 어떨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일 년 중 대부분이 맑은 날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금방 떠오른 해는 물에서 건져 낸 붉은 토마토처럼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주변에 흩어지는 여명이 없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망통을 프랑스의 진주라고 하는 까닭을 알았다.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노부부가 아침인사를 한다. 우리도 오늘 하루는 여행객이 아닌 휴양객이 되어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