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신비로운 자연 앞에서 울컥한 적이 있었다. 풍화와 침식이 만들어 낸 대자연을 바라보며 감탄이나 탄성을 지르기에 앞서 뭔가모르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던 장면. 바로 미 서부여행 중에 갔었던 그랜드캐년에서 였다.
나를 감동시킨 그랜드캐년협곡 다음으로 웅장한 곳이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베르동 협곡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유럽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에서는 겹겹이 쌓인 지층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콜로라도 강물을 보며 인간의 무력함을 느꼈었는데 이곳 베르동협곡은 거대한 절벽아래로 흐르는 알프스빙하의 옥색 물빛에서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한 신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 계획으로는 자동차를 렌트해서 오려고 마음먹은 곳이었지만 길이 험하다는 말을 듣고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 여행을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절벽위로 난 울퉁불퉁 좁은 길을 유연한 솜씨로 운전하는 기사님의 운전실력이 대단해 보였다.
시야가 넓어지고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계곡의 푸른 물줄기가 보이면서 차를 랜트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마터면 저 아름다운 경치보다 자동차의 백미러만 바라보고 왔을 뻔했기 때문이다.
오늘 함께 여행을 온 팀은 모두 세 팀이었다. 서로 바라만 봐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신혼부부와 첫 아이를 임신하여 임신 축하 여행을 왔다는 젊은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였다. 우연히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인생의 순리를 조합해 놓은 듯한 여행의 멤버들이다.
차창 밖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다. 자동차를 타고 바라보기에도 두려운 이길을 산악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말 근육처럼 튼튼한 종아리를 쭉쭉 뻗어 페달을 밟는 모습에 건강함이 넘친다.
베르동협곡으로 난 이 길은 200년 전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넘어 온 길이라고 한다. 방금 산악 자전거를 타고 간 사람들이 사라진 길 끝을 바라보며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렸을 군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산을 넘느라 지치고 힘들었을 군사들도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경치를 보고 탄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알프스를 바라보며 여행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알프스의 품으로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다. 하얀 화강암이 넓게 퍼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얗게 눈이 쌓인 풍경처럼 보인다.
차에서 내려 산 정상에 서 있는데도 아직도 발바닥이 근질거린다. 전망대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멀리 보이는 생트 크루아 호수와 탁 트인 하늘, 꿈틀거리는 계곡의 옥색 물빛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무서움도 잊은 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르동 계곡과 생트 크루아호수
산 아래에 있는 생트 크루아 호수는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아 놓은 인공호수다. 아까 산 위에서 멀리서 봤을때와 달리 호수의 물빛은 불투명한 옥빛이었다. 빙하가 녹아서 흐른 물은바닥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신혼부부는 오리배를 타고 젊은 부부는 패들보트를 탔다. 나와 남편은 호숫가를 산책하며 알프스 숲의 정취에 푹 빠졌다. 주변에 붉게 익은 야생체리를 따먹기도 하고 호수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청둥오리들을 바라보며 여행의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 호숫가 선착장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손짓을 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사님은 우리에게 차 안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내렸는지부터 물었다. 방금 우리가 타고 온 자동차의 뒷좌석 창문이 심하게 깨져 있었다. 누군가 차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가려고 잠가져 있는 창문을 깬 것이다. 산산조각이 된 유리 파편이 의자에 낭자하게 흩어져 있고 그곳에 두고 내린 남편의 배낭이 없어졌다. 다행히 여권과 지갑이 들어있는 다른 가방은 몸에 지니고 있었다.
잃어버린 배낭 안에는 여행 중에 필요한 소지품들이 들어있었다.
아름다운 생트 크루아 호수에서이런 일을 당할 줄 몰랐다. 신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선악과도 먹게 하셨다.
방금까지 자연을 보고 감탄했던 마음이 깨어진 차창보다 더 아프게 부서져 버렸다.
기사님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자동차 털이범을 이런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만나게 되다니....
깨어진 차창
여행 중에 현지 경찰서를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찰서에는 우리 말고도 피해자들이 많았다. 주로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어떤 젊은 부부는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는 사이에 감쪽같이 뒤 좌석에 둔 캐리어를 도난당했다고 한다.
파리에 처음 도착 한 날, 한인택시 기사님이 한 말이 떠 올랐다.
여행중에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못나서 당한다는 말, 그 말이 맞다.
처음 이곳에서 길가에 세워 놓은 자전거의 앞바퀴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세워둔 자전거의 바퀴까지 훔쳐가는 극성스런 소매치기들 때문에 자전거 주인은 아예 바퀴를 분해해서 들고 간다는 말을 듣고는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도 저 자전거의 주인처럼 우리 물건은 우리가 지켰어야만 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서류를 건네주며 배낭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모두 적으라고 한다. 금방 찾아 줄 것처럼 깐깐하게 조서를 꾸민다.
보온병, 카디건, 양산, 머플러, 열쇠 등 잃어버린 물건들의 내역을 적다 보니 훔쳐 간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여행 오기 전에 보험을 들어 놨으므로 우리는 착실하게 서류를 챙겼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소나기가 퍼붓는다. 깨어져 버린 차창으로 빗물이 들이닥친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