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한 차례 비가 내렸다, 이상하게도 이 나라 사람들은 비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춥지만 않으면 나도 이곳 사람들처럼 비 맞는 걸 즐기며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산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머리카락을 가졌다. 물에 젖어도 굽실한 그들의 머리카락과 달리 찰싹 들어붙는 머리카락 때문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 비 오는 날의 기차여행도 제법 운치가 있다.
우리는 니스로 돌아가기 전 중간에 있는 도시 앙티브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프랑스는 예술가들의 사후 흔적을 그 들이 살면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한 마을을 통해 알려 준다. 아를은 고흐를, 엑상 프로방스는 세잔을, 생 폴 드방스는 샤갈, 그리고 이곳 앙티브는 피카소의 흔적을 기린 마을이다. 예술가들이 묻힌 무덤은 하나같이 소박하지만 삶의 자취는 살아온 곳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니스와 칸 사이에 있는 도시인 이곳 앙티브는 구 도시에 있는 그리말티성을 개조하여 피카소의 뮤지엄으로 만들었다. 이곳까지 와서 피카소를 만나지 않고 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앙티브에 도착하자 비가 멎었다. 역 앞에 바로 공원이 있고 공원 끝자락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다. 작은 항구에는 요트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다. 코스타쥐르 해변에 있는 도시들은 정박해 둔 요트들의 수로 부를 가늠한다. 작은 도시이지만 과장해서 이 쑤시게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세워 둔 요트들이 있는 걸 보면 이곳이 얼마만큼 유명한 휴양지인지 가늠이 간다.
곧바로 피카소갤러리인 그리 말티 성으로 갔지만 점심시간에는 잠시 휴관을 한다며 기다려 달란다. 그리 말티 성 바로 아래에 시장이 있다. 눈으로만 봐도 굉장히 활기찬 시장이었다,
앙티브의 재래시장은 물건의 종류가 다양했다. 남 프랑스 지역 어디를 가나 있는 마르세유 비누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종류의 올리브 장아찌와 올리브기름, 갖가지 치즈, 과일, 야채, 모로코산 가죽 실내화와 실내 장식품 가까운 스페인에서 올라온 와인과 잼도 있다.
뜨거운 불화덕에 굽는 ’ 소카’가 이 시장의 인기 먹거리인 듯 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나도 기다란 줄 끝에 서서 기다렸다. 오늘 점심은 이곳에서 먹기로 했다. 시장이 좋은 이유는 이렇게 격식 없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카'는 이 지역 사람들이 즐겨먹는 간식인데 우리의 감자전과 비슷하다. 기름에 지지는 것과 화덕에 굽는 것만 다를 뿐 맛은 거의 똑같았다,
이곳 시장에서 팔고 있는 채소나 과일은 빛깔이 무척 선명했다.
지중해의 태양빛을 푸짐하게 받고 자란 열매들은 자신들 본연의 색깔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중에서도 붉은 토마토와 청 보라색 가지의 색깔이 유난히 곱다. 자극적인 색깔에 이끌려 몇 개 골랐다. 토마토는 아침에 주스를 만들어 먹고 가지는 올리브기름에 지짐을 부쳐 먹을 요량이다. 시장에서 기념품이 아닌 식료품을 사면서 왠지 이 고장 사람들과 비슷해져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지와 토마토가 담긴 봉투를 들고 오면서
이곳에 오기 전 기차 안에서 만난 다정한 노부부를 생각했다. 비에 젖은 부인의 머리를 닦아 주느라 정작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남편이다.
이 나라의 노부부들은 젊은이들보다도 더 애정표현을 잘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프랑스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이 있지만 아내를 감싸주는 마음은 가지의 속살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겉모습과 다르게 부드러운 속마음을 가진 가지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과 속이 닮아서 속마음을 금방 들키고 마는 토마토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 결이 다르다.
우리 남편은 토마토다. 속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지금 남편은 다시 피카소 뮤지엄이 있는 그리말디 성으로 올라가기가 싫은 눈치다.
걸어서 시장을 구경하고 점심까지 먹고 나니 나른하였던 것이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쉬고 있구려 "
카페에 남편을 남겨두고 나는 홀가분하게 프랑스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남자, 피카소에게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