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때 날씨가 좋으면 여행의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날씨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한 여름 소나기가 내린 날, 아이들과 함께 갔던 야외 수영장은 나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맨 살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의 촉감이 너무나 상쾌해서 아이처럼 맨발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흐린 가을날의 남이섬은 왜 그렇게 좋았을까, 잿빛 하늘이 내려앉은 라이브 카페에서 젊은 부부가 들려주는 기타 소리는 우울한 날씨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여행하는 동안 계속 비가 내려서 산봉우리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장가계에서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날씨는 여행의 장소가 어디인가에 따라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칸으로 가는 오늘은 날씨가 좋았으면 한다. 하지만 오월의 날씨답지 않게 스산한 기운이 들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여행 중에 옷 걱정을 해 본 적이 전혀 없는데 오늘은 신경이 쓰인다. 지금 칸에서는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칸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어젯밤 이곳 숙소에 있는 한 여학생은 화려한 옷을 입고 칸을 다녀왔다. 어디서나 눈에 띌 듯한 노란 드레스였다. 이 친구는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자신이 찍은 사진 속 주인공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영화감독이 꿈이라는 여학생은 칸을 다녀온 후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오월에 칸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이처럼 의상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겉으로는 웃으며 여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캐리어 속의 내 옷들을 하나씩 점검 중이다.
여행 중에 혹시 가방을 잃어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 없는 옷들만 챙겨 온 나였다. 그중에 다행히 한벌의 옷이 생각났다. 파리에 있는 동안 혹시 뮤지컬을 보러 가게 되지 않을까 해서 준비한 옷이다. 시원한 ‘마’ 소재로 만든 코발트 색 통바지와 하얀 리넨 블라우스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정장에 가까우며 선명한 색깔의 옷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쌀쌀한 날씨에는 얇은 마바지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하늘은 곧 비라도 내릴 듯이 우중충하게 구겨져 있다.
어쨌든 나는 초 여름 정장을 입고 칸으로 간다. 누가 보면 초청장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의기 양앙한 출발이다.
니스 빌 역 앞에서 환전을 하고 기차를 탔다. 40여분을 달리면 칸에 도착한다.
붉은 카펫이 깔린 ‘팔레 데 페스티벌에 데 콩그레’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카메라들이 여기저기서 플래시를 터뜨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의 눈빛이 삼엄하다. 구경꾼들은 저마다 다양한 옷을 입었지만 등산복에 배낭을 멘 여행자들도 많았다. 인파 속에서 발꿈치를 들고 무대를 바라보았지만 도무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언뜻 보여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멀다. TV 화면에서나 보던 광경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것 외에 별 다른 감흥이 없다.
갑자기 주변에 있는 한국 여행객들이 술렁거린다. 뭘까?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 위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대형 TV 화면에 내가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이창동 감독과 주진모 배우다. 반가웠다.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사회자와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극장 안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감동스러워했다. 아마 오늘 민박 집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제 그 친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이곳에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은 본선에 오른 영화를 보기도 하고 축제기간 동안 펼쳐지는 또 다른 행사를 즐기기도 한다. 어제 노란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칸에 온 여학생은 또 다른 행사를 즐기려고 온 게 아닐까, 영화감독이 되고싶은 꿈을 가진 학생이니 옷을 차려입고 갈만한 장소가 있었을 것이다.
축제라는 것에 서툰 나는 인파가 몰려 있는 극장 앞이 혼잡스럽기만 할 뿐, 오히려 조용한 해변가를 걷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려나무가 즐비한 크루아제트 산책로에는 길 양편에 고급 뷰티크 샵이 있고 아름다운 정원 안에 특급 호텔들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 종려상은 이 해변에 줄지어 서 있는 종려나무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클로드 드뷔시 극장 앞의 핸드 프린팅 된 배우들의 손바닥과 종려나무의 넓은 잎사귀가 서로 닮은 건 우연의 일치겠지,
배우들의 핸드 프린팅
극장 앞이 아닌 길거리에서 더 많은 배우들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날씬한 미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귀여운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여인도 있고 경호원을 거느리고 걸어가는 미녀도 보인다. 거리를 배경으로 화보를 찍는 사람도 있다. 한여름처럼 온통 가슴까지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 연기자들이라고 한다. 다만 초대받지 못한 무명 배우들일뿐, 지금은 화려한 드레스로 자신을 꾸미고 본 대회장이 아닌 거리에 서 있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초대장을 받고 이 축제에 참석하게 될 날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 들 중에는 전 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 시즌에 길거리 캐스팅의 희망을 품고 이곳에 오는 배우들도 있다고 한다. 어젯밤 민박집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왠지 근거없는 말은 아닌 듯 하였다.
그 사이 비가 한 차례 뿌렸다. 기온이 뚝 떨어져서 목에 두른 스카프만으로는 체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같은 날, 한여름에나 입는 마바지를 입고 이곳에 온 내가 갑자기 광대가 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