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김춘수의 시를 샤갈보다 더 먼저 알았다. 샤갈이 그린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를 썼다는 시인의 후기를 읽고 샤갈의 마을을 나름대로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림 속 암소의 눈은 영롱하였고 샤갈 자신의 모습을 그린 남자의 얼굴은 초록으로 표현되었다. 꿈을 꾸듯 몽롱한 그림이다.
생 폴 드 방스는 ‘샤갈의 마을’ 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을 사랑한 샤갈은 이곳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다가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과연' 나와 마을' 이란 그림과 생 폴 드 방스는 얼마나 닮아있을까?
샤갈의 마을인 '생 폴 드방스'로 가는 오늘은 전형적인 오월의 봄 날씨다. 어젯밤 숙소에서 이곳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던 중에 숙소 사장님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곳 식구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미술을 전공하러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았다는 사장님의 프랑스어 실력은 원주민 못지않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콜롱브 도르 호텔’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이 호텔은 근 현대 화가들의 진품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더욱 유명한호텔이라고 한다. 밖에서 본 호텔의 규모는 그다지 크거나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룻밤 묵기위해서는 꽤 오랜 기간을 기다려 된다고 한다. 프랑스 배우 이브 몽땅이 결혼식을 올리면서 더 입에 오르내렸다는이 호텔은
콜롱브 도르호텔
원래 성 밖에 있는 초라한 여인숙이었다.
주로 가난한 화가들이 머물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었다.그들은 숙식비 대신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맡겼고 시대가 바뀐 지금 저당 잡힌 작품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홋가하여 그 후손들에게 고급스런 호텔로 격상시켜 준 것이다.
사장님은 전에 이곳에서 칸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유명한 배우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며 운이 좋으면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운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마을 전체를 돌로 둘러쌓은성 때문인지 왠지 이 곳은 변화무쌍한 바깥세상과는 무관해 보였다.
성문을 지나자마자 현대의 것이라곤 투명하게 비치는 햇빛뿐인 중세의 마을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타임머신을 타고 순간 이동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더구나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은 차마 밟고 지나가기가 조심스러울 만큼 정교하게 자갈을 박아서 꾸민 길이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그랑(Rue Grand) 거리는 그 옛날에는 마차가 다니는 신작로였을 것이다. 꽃과 화병, 나비와 태양등, 자잘한 자갈로 자연의 이미지를 꼼꼼히 수놓은 길은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름다운 ‘자갈 카펫’을 밟으며 언덕 위로 오르는 동안 몽환적인 샤갈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생폴 드 방스는 마을 전체가 뮤지엄처럼 보인다. 창가에 걸어 둔 꽃 하나가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고 금 간 항아리도 품위 있는 장식품이 된다. 예쁘게 꾸민 가게들과 길가에 장식된 조각품. 돌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놓은 듯한 화분들. 맑은 물이 솟아나는 분수대의 조각들을 보면 이 마을 사람들의 몸 안에는 분명 예술적 감각이라는 또 하나의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 마네킹이 쓰고 있던 왕골모자를 사고 찍은 기념사진.
여자들은 맘에 든 소품 하나를 구입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골목에 있는 편집 샾에서 왕골모자를 구입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언덕을 오르며 샤갈의 동네를 구석구석 누빈다.
집과 집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홀연히 사라지는 골목길, 언덕으로 오르는 돌 층계, 지도에는 대분수라고 표기되었지만 대분수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분수광장의 조형물들, 초현실주의였던 샤갈은 이런 풍경들을 주로 하늘 위를 나는 사람들과 꽃, 그리고 붉은 집들로 경쾌하게 표현했다.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샤갈이 그린 천정화를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며 느꼈던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금 이곳에서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다.
작가 김춘수는 이곳에 오지 않고도 이곳을 와본 듯 시를 지었다. 그가 노래한 샤갈의 마을은 쥐똥 만한 겨울 열매들이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드는 삼월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오월의 정점, 성벽 아래는 붉은 양귀비꽃이 한창이다. 양산을 쓰고 양귀비 언덕을 넘어오는 모네의 그림 같은 배경이 도처에 널려 있다. 따뜻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구름, 넓은 들판... 오월의 프로방스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곳 샤갈의 마을에서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샤갈의 묘
마을 끝 언덕 아래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샤갈의 묘를 찾기는 쉽지가 않았다. 화려하고 웅장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초입에 있는 샤갈의 묘는 너무나 소박하였다. 네모난 대리석 무덤 위에는 이곳을 다녀 간 여행자들이 얹어 놓은 돌멩이가 동그란 하트를 이루고 있을 뿐 흔한 꽃다발 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MARC CHAGALL (1887-1985)이라는 이름이 적힌 그의 묘를 바라보며 한 시대를 살다가 간 예술가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샤갈의 영혼은 이곳 생 폴 드 방스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이곳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보며 이곳 사람들이 묘지를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돌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오래된 벽돌집에서 네모 난 창문의 주인이 불현듯 중세의 옷을 입고 나타날 것만 같다.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핀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게 하고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선글라스를 벗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행 중 누군가 "아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라고 속 마음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하루만 더 있고 싶다고 한다.
‘연금술사’를 지은 파울로 코엘로는 ‘무엇인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곧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와준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내 속 마음을 엿듣는다면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는 행운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