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의 민박집주인은 남편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마땅히 부를 호칭도 없지만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왠지 부담스럽다. 아직은 아저씨나 아줌마로 불리어 지는게 좋다. 아무튼 오늘 우리 어르신과 나는 트램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에즈를 들러 모나코까지 다녀올 예정이다.
"버스를 타고 에즈로 가는 노선입니다 트램을 타고 보선에서 하차 그다음이 중요해요 100미터쯤 후진해서 왼쪽으로 가면 굴다리가 보일 거예요. 그곳을 통과하면 정류소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82번 혹은 112번 버스를 타시면 됩니다."
민박집의 젊은 주인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처음으로 심부름 보내는 엄마 마냥 에즈로 가는 노선을 쪽지에 적어 꼼꼼하게 일러준다.
니스 시내 외곽에 있는 트램 정거장인 보선에서 내려 무사히 굴다리를 찾았다. 그곳은 교외에 있는 버스 종착역이었다. 우리네 시내버스 종점과 거의 똑같다. 사람들은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느라 에어컨이 없는 정류소 안보다 승강장에 있는 벤치나 담벼락 그늘 아래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담벼락 그늘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지칠 즈음 버스가 들어왔다.
기다란 바케트 빵을 한 아름 안은 할아버지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순박하게 보이는 어르신이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바르잔까지 간다네"
바르잔은 아마 에즈와 모나코 사이에 있는 마을 이름 같았다.
"무슨 빵을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네 할아버지를 만난듯한 다정함에 이끌려 스스럼없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손 짓과 발 짓까지 동원해서 한참 설명하신다.
"아~ 식구가 많으시군요"
내 엉터리 통역을 이해한 듯 두 어르신이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에즈는 산 꼭대기에 위치한 요새 마을이다. 니스에서 에즈로 가는 길은 그래서 아름답다. 굽이 굽이 돌아가는 산길 아래에는 푸른 지중해가 넘실대고 절벽 사이를 비집고 지은 집들은 엽서에서나 봤음직한 풍경들이다.
“할아버지는 참 좋겠어요 이렇게 예쁜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
동양에서 온 아줌마가 부러워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사람 좋은 미소로만 응답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문득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갔던 이화동 벽화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가 생각났다.
언덕배기에 있는 성벽 아래로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 다 보이는 동네는 그 날 따라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저녁 무렵에 할머니들 서 너 분이 가게 앞 의자에 한가롭게 앉아 계셨다. 그때 내가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다.
“할머니들은 참 좋겠어요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사시니까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께서 무심하게 대답을 하였다.
“가난한 동네가 뭣이 좋다고 구경을 하러 온다요, 나는 평생을 살아도 좋은 줄 모르 것 구먼 “
그때, 나는 아름다움은 가난과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이 화려한 도시였더라면 그 모습에 가려서 노을이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러보면 조물주는 누구에게나 선물을 평등하게 나눠주었는데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순박한 프랑스 할아버지도 이 곳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는 진실로 무척이나 부러웠다.
에즈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자신은 두 정거장을 더 가야 내린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설명했는데 아마 집까지는 또 걸어서 가야 한다고 한 것 같다.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기다란 바케트 빵 하나를 주신다. 괜찮다고, 고맙다고, 받은 거나 진배없다고 우리말로 횡설수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프랑스 할아버지의 행복한 미소
마을 입구에서 산 위까지 돌계단이 이어지고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갤러리,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꽤 비탈진 언덕길이지만 점점 넓어지는 주변의 경치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이 곳에 올라오자마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산 꼭대기에 열대 정원이 있으리라 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커다랗고 기다란 선인장들이 무사처럼 호위하고 있었다.
높고 고립된 지형이 마치 독수리 둥지를 닮았다고 하여서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에즈 빌리지 정상에서 나는 멀리 해안을 내려다 보았다.
선인장 사이로 보이는 리베리아 해안은 네모난 틀을 어디에나 갖다 대어도 훌륭한 그림 액자가 되는 풍경이었다. 해안가 야자나무 숲에는 널찍하니 터를 잡은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하다. 넓은 수영장이 있는 저택을 바라보면서 꿈처럼 사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 곳은 사상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탄생 시킨 곳이기도 하다. 신이 만든 아름다운 경치를 독식하고 사는 부자들을 보면서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의 말을 떠 올렸다.
저 아래 해안가에는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의 별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서로 헤어진 걸 보면 아름다운 경치를 누리며 사는 것과 행복한 부부생활은 무관한 것 같다.
인생의 진짜 행복은 뭘까? 방금 헤어진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봉지 가득 한아름 빵을 안고 미소지으시던 모습,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가족들과 함께살고 있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