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처럼 휘어진 니스해변은 오래 전 달력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니스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해안가로 왔다. 해변에 깔린 몽돌은 비에 젖어 더욱 검게 윤이나고 있었다.
니스빌 역에서 비를 만났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숙소까지 오면서 갑자기 돌변한 날씨를 원망했는데 비로인해 더욱 운치가 있는 니스해변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경치는 날씨와 무관하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구도시에 있는 니스성으로 가기위해시내를 순환하는 트램을 탔다. 시내 중심에서 내려 몇발짝 걷지않은 곳에 시간여행의 출발점처럼 구도시의 성문이 나타났다. 무심하게 중세의 문턱을 넘어서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대포 소리가 들렸다. 대포 소리였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을 뿐 그 순간에는 벼락치는 소리 같았다.
니스의 구 도시는 예전 모습대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성당에서는 미사를 집전하며 광장에는 서로 모여 만남을 갖는다. 그중에 정오가 되면 대포를 쏘아서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의식을 그대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나를 놀라게 한 커다란 소리는 정오를 알리는 대포 소리였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 중에는 나처럼 놀라서 시청으로 문의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골목으로 이어진 시장 안은 무척 분주했다. 음식을 파는 식당이 즐비하고 의류와 가방, 모자를 파는 가게와 식료품과 기념품 가게들이 있다. 우리나라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것처럼 이곳 재래시장도 외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구도시는 더욱 예스러웠다.
오후가 되어 빗줄기가 사라진 살레아 광장에 벼룩시장이 열렸다. 작은 액세서리부터 값비싼 보석 장신구. 은 촛대와 쟁반, 그릇과 주방기구들, 그림, 카펫 등 고가의 물건도 있다. 이곳 광장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볼거리를 마주치게 되어 나는 신이 났다. 눈요기만 해도 충분할 걸 지름신이 발동했다. 될 수 있으면 기념품 따위는 사지 않기로 여행 전에 약속했었지만 어쩌랴,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거니까,
금장식이 화려한 커피잔 한 쌍이 눈에 띄었다. 예전 여행 중에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사지 않고 지나친 것을 후회한 적이 있었다. 저 커피잔 역시 사지 않으면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을 것 같다. 우리 집에 골동품 하나가 더 늘었다.
장소에 따라 또는 어느 잔에 담겨 있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커피는 분위기를 마신다고 생각한다. 남이 쓰던 물건을 달가워하지 않는 남편과 달리 벼룩시장에서 맘에 드는 물건을 고를때면 나는기분이 좋다. 왠지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보물이라도 찾은 듯 뿌듯하다.
마티스와 샤갈의 박물관이 있는 동네는 서로 방향이 같고 거리가 멀지 않아서 두 곳을 한 번에 돌아봐도 무방 할 것 같다.
니스의 부촌인 시미에 지구에 있는 마티스 미술관은 언덕 위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래되어 퇴색한 듯한 붉은 건물의 외관이 매혹적이다. 주변의 풍경을 압도하는 강렬한 색상의 건물 안에는 니스에서 오랫동안 기거하다 생을 마감한 마티스의 조각과 회화, 그의 가족들이 애장 하던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고급스럽고 디자인 또한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아까 내가 산 커피잔과 비슷한 모양의 그릇을 보았다. 마티스 부인의 안목과나의 취향이 닮았음을 남편이 알아주길 바랐다.
도시가 넓지않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하다는 민박집주인의 말과는 달리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지치지 않을 만큼 볼거리가 다양했다. 니스는 중세와 현대가 어울려있어 조화로운 도시다. 둘 중 어느 게 특출 나지 않고 서로 양보하여서 조화라는 새로운 미를 탄생시킨 도시라고 해야 할 것같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산 물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인의 실루엣과도 같은 날렵한 커피 잔 손잡이가 뎅강 목이 잘려 나간 것이다. 그릇이 들어있던 베낭은 하루종일 남편이 메고 있었다.
아깝다. 화가 난다. 원망스럽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딸아이가 “엄마 아빠, 여행 중에 싸우지 마세요”하고 당부를 한 말이 방 안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딸아이의 당부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화를 낼 수없는 것은 이곳이 니스이기 때문이다.
니스는 신혼부부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손꼽는 여행지라고도 한다. 더구나 내일은 검은 몽돌이 깔린 니스 해변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로 한 날이다.
아무리 칼로 물 베는 부부싸움이라 해도 ‘싸움’이란 단어는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니스의 몽돌 해변에서 “나 잡아 보라”며 해변을 달려 볼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것은 직무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