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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에 부는 바람

오베르 쉬르 우아즈

by 연희동 김작가


"안녕하세요 고흐 님… 고흐 선생님이라고 해야 되겠군요. 저는 당신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 '까마귀가 나는 밀밭 풍경'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당신의 유작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아침 낯선 길을 묻고 물어서 겨우 찾아온 이곳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오월의 날씨답지 않게 몹시 쌀쌀하군요

생나자르 역에서 퐁투아즈로 가는 교외 전철을 탈 때만 해도 날씨는 이렇지 않았답니다. 하늘에 구름은 조금 무거워 보였지만 당신을 만나러 오는 들뜬 내 마음을 가라 앉히기에는 어림없었죠, 그런데 퐁투아즈에서 크레이로 가는 기차로 바꿔 타려고 육교 위를 건너갈 때 내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하마터면 기차의 지붕 위로 날아갈 뻔하였답니다.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이렇게 아무 탈 없이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무거운 화구를 메고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는 고흐의 청동 동상 앞에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보고 싶었던 고흐에게 인사를 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허약하고 힘들어 보이는 고흐의 모습은 오히려 어떤 투정도 다 받아 줄 것처럼 온화해 보였다.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오월은 고흐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풍경 그대로였다. 마을 언덕을 오르는 길에 보랏빛 붓꽃이 피어 있는 모습도 그대로이고 오베르 성당도 안녕하다. 이곳에서 살았던 두 달 동안 가장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고흐, 내가 지금 바라보는 오월의 풍경을 고흐도 바라봤을 걸 생각하니 같은 기후와 같은 풍경을 느끼고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 실가닥 같은 동질감을 느낀다.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작가의 고뇌는 어쩌면 나만 느끼는 것 일수도 있다. 그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하나하나 찾아볼 때마다 사후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생전에 나눠 가졌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간절하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고흐의 고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네였다. 아담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은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 줄 것만 같은 소박한 마을이었다.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마당에서 꽃을 가꾸는 사람, 개들과 산책하는 사람, 창문을 열고 햇빛을 쬐고 있는 사람 등, 일상의 생활을 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평화로운 모습들이 고흐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거지든 매춘부든 인간의 영혼은 다 아름답다` 라고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그는 사람의 정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것 같다.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폭한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던 아를을 떠나 이곳으로 온 고흐는 이 마을에서만은 이웃의 따뜻한 눈빛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차 그는 바라던 것을 찾지 못했나 보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가 보면 그 사람의 심경까지 느끼게 된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걸으면서 쓸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카페 라부’의 고흐의 방은 너무나 좁았다. 다행인 것은 그 방에 창문이 있고 창문 밖으로 거리의 풍경이 보인다는 것, 하지만 창문 하나 사이로 계절이 달라져 보인다. 창문 밖은 봄이지만 이곳은 그가 고통을 겪었던 칠월의 마지막 하루가 그대로 있다.

방 안에 달랑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보는 순간 고흐의 삶이 그대로 느껴졌다. 사랑에 대한 불안과 실패, 궁핍한 생활과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자석에 붙은 쇠붙이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방 안에서 그의 외로움이 스멀스멀 번져왔다.


오베르 교회는 고흐가 그렸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교회 앞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는 샛길도 그림 속의 풍경처럼 바람소리조차 숨기고 있다. 무거운 화구를 메고 이 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고흐의 거친 숨소리가 배어 있는 길이다.

잡목 숲 사이로 난 길 끝에 밀밭이 보인다. 이곳이 고흐의 마지막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초록 물결을 이루는 밀이랑과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 고흐의 마지막 장소였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 오랫동안 내 뇌리에 잔상으로 남았던 밀밭 사잇길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오늘따라 밀밭 위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구름 사이로 내려 꽂히는 한 가닥 햇살로 밀밭 풍경은 그로테스크하다. 새파랗게 질린 오월의 밀밭은 아직도 그날의 총성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밀밭 옆 공동묘지에서 그의 묘를 발견 한 순간 고흐에 대한 연민이 조금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놓아둔 해바라기 조화가 아니었으면 찾지 못할 뻔한 고흐의 묘 옆에 동생 테오의 묘가 나란히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비 넝쿨로 뒤 덮인 두 개의 묘는 의외로 소박하였다. 평소에 사랑했던 동생 테오와 함께 잠들어 있는 고흐의 묘지를 보며 질기도록 함께 한 그의 외로움이 비로소 짝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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