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북서쪽에 있는 몽생미셸은 하루 여정으로는 빠듯하였다. 생각 끝에 이 곳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투어를 선택하기로 했다. 아침에 출발해서 다음 날 새벽에 돌아오는 코스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 우리를 보고 호텔 매니저는 평소처럼 메모지부터 챙긴다. 이곳에 온 첫 날부터 관광지도에 노선표를 알기쉽게 표시하며 우리를 챙겨주는 착한 프랑스사람이다.
"오늘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 혼자 갈 수 있거든?"
호의를 거절하자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호텔에서 바라다보이는 개선문 앞에서 여행사의 버스를 타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근처 슈퍼에서 초콜릿과 제 철인 체리를 샀다. 점심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간단한 간식을 챙기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해서 준비해 간 오징어 볶음을 넣어 주먹밥도 만들었다.
이제 개선문 옆 지하철 출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투어 버스만 타면 된다. 호텔 문만 나서면 바로 개선문이 보이는데 걱정할게 뭐가 있겠는가, 소풍 가는 아이처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여행은 언제나 변수가 따른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여행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그런데 하필 오늘 그 변수가 생기다니,
호텔 로비를 나서자 뭔가 싸한 느낌이 든다. 거리 입구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전투복을 입은 경찰들이 곳곳에서 검문을 하고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새까만 아저씨가 그보다 더 새까만 총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뭔 일여?"
"오늘이 프랑스 기념일인 거 몰랐어?""
그래서?"
"개선문에서 승전 기념식을 하니까 너흰 못 들어가"
"못 가면?"
"저 쪽으로 돌아서 가야할걸"
정면으로 약속 장소가 빤히 보이는데 돌아서 가라고 한다, 그렇게 라도 갈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거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가방 검색과 몸수색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비닐에 싼 체리가 떨어져 또르르 굴러가고 배 안에 복대를 찬 남편은 검사할 때마다 옷을 들추기가 민망해서 아예 복대를 목에 걸고 다녔다.
무장을 한 여자 경찰관이 플라스틱 찬 통 안에 담긴 주먹밥을 유심히 바라본다. 나의 점심 도시락이라고 말했다. 여경은 나를 한편에 세우더니 다른 경찰관을 부른다. 수염이 덥수룩한 경찰이 내 맛있는 점심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순간 저 도시락은 뺏기지 않고 돌려줘도 못 먹겠다는 생각을 했다. 냄새를 실컷 맡아본 털 수염 경찰이 "맛있겠군", 하며 도시락을 돌려준다.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구경꾼들이 신기한 듯 내 도시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어제 이 곳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그 시간에 나는 오르세 박물관에 있었다. 서울에 있는 아이들이 놀라서 문자를 보낸 뒤에야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최근 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IS테러 때문인지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이 곳 개선문 주변은 무척 철저하게 검색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가는 중에 출입문에 노란 폴리스라인이 쳐 있는 걸 보았다. 누군가 낡은 가방을 의자에 놓고 갔는데 아마 그것이 폭탄이 아닐까 의심되어 조사하는 중이었다. 날렵한 군견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나서 안심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자 그제야 통행이 되었다. 내 도시락은 개가 아닌 콧수염 경관이 냄새를 맡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행사에서 약속한 출발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고 샹젤리제 거리는 아예 통행을 막아 놔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여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프랑스의 국경일인 전승 기념일은 매년마다 개선문에서 커다란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내가 계약한 여행사도 오늘의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약속 장소를 개선문 근처로 그대로 정한 것은 뭘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복사해 온 바우처에 쓰인 전화번호를 보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볼멘소리였다.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여행사 직원이 그곳으로 갈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 지금은 움직일 수 조차 없이 거의 갇혀 있는 상태다.
그 순간 거리에는 각국의 국기를 단 고급 세단들이 귀빈들을 태우고 개선문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중에는 태극기를 단 세단도 눈에 뜨인다. 태극기를 보자 갑자기 화가 풀린다. 손을 흔들며 박수를 쳤다.
이렇게 애국자가 되는거구나..,.,
내 딸 또래쯤으로 보이는 여행사 직원이 온 몸에 땀 범벅이 되어 요행히 우리가 있는 장소까지 찾아와 주었다.
“오늘 중으로 가긴 하는 겨?”
급하면 사투리가 방언처럼 터진다. 다행히 출발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호텔을 나설 때 지배인이 짓던 야릇한 미소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