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 지른다. 뚱뚱한 호텔 매니저 알렉스는 겉모습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무척 만족하며 최선을 다 하는 것 같다.
며칠 전 우리가 시내버스를 잘 못 타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뭐든 또박또박 열심히 알려 준다. 먼저 지도를 꺼내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을 체크하고 가야 할 장소를 정성스레 선으로 그은 뒤 정거장 수까지 적어 준 다음에 그때서야 몹시 아끼는 미소를 날리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한다.
알려준 대로 오텔 드 빌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자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먼저 뾰족한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지붕이 위압감을 주는 오텔 드 빌은 파리 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 안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몸집이 커다란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는 사이로 건물 안을 기웃거려 보니 민원서류를 들고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네 사무실 풍경과 비슷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퐁피두 센터에 대하여 미리 알아보지 않고 왔더라면 아마 이곳은 짓다가 방치해 둔 건물이거나 아니면 조금 신경 써서 만든 쓰레기 소각장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층계와 철골 배관 파이프 등이 모두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마치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고 진행 중인 건물처럼 보였다.
이 건물은 프랑스 문화의 상징으로 파리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건축물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내가 얼마나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지 알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들인데 이런 곳에 초현대식 전위적 건물이 있다는 건 파격이 아닐 수 없다.
퐁피두 센터의 건물은 마치 피카소의 입체적인 그림을 보는 것처럼 난해하였다. 이 난해함이 결국 나를 혼란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복합 문화센터인 이곳은 공연장과 영화관 도서관 등이 있고 4층~6층은 국립 현대 미술관이다. 우리는 미술관을 갈 예정이다.
현대식 건물의 단점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독특한 외형 탓에 멀리서도 건물은 빨리 찾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미술관의 출입문이 따로 있는 줄은 몰랐다. 건물 앞에 늘어 선 기다란 줄 끝에 서서 가방 검사까지 마친 뒤 에야 안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미술관은 4층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트를 탔다. 아무리 찾아봐도 미술관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책과 컴퓨터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 뿐, 라이브러리로 잘 못 들어 선 것이다. 나중 에야 알게 되었지만 미술관의 출입문은 건물의 정 반대쪽에 있었고 그곳은 줄도 서지 않을뿐더러 가방검사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길동무 안쯔이를 만났다.
안쯔이도 우리처럼 미술관을 잘못 찾아와서 헤매는 중이었다. 건물 안에서 길을 잃은 어리숙함으로 하나가 된 우리는 함께 미술관 찾기를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도서관에서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서로 눈짓과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돌아다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로 1층으로 내려갔던 안쯔이가 우리를 찾으러 다시 올라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양볼이 빨갛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안쯔이가 먼저 찾았다. 1층 로비에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 것을 우리는 습관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무조건 4층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제야 안쯔이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쯔이는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하는 홍콩 여학생이었다. 동양 여성치곤 제법 큰 키에 쌍꺼풀이 없는 눈, 단발 커트를 한 검은 머리가 단정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서인지 딸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그 녀는 전망 좋은 창가에 우리를 서게 하고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마티스 샤갈 피카소 등 20세기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며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인테리어를 전공하는 학생이어서 그런지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남편과 안쯔이는 영어로 의사를 소통하고 나와 안쯔이는 눈으로 대화를 했다. 우리는 국가와 나이를 초월하여 친구가 되었다. 우리끼리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 보면 모르는 사람들은 가족 여행이라도 온 줄 알 것이다
안쯔이가 다니는 학교에 한국인 친구는 있지만 한국에는 아직 와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안쯔이가 한국에 온다면 곱게 한복을 입혀서 고궁 나들이를 해 주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것과 만나게 될까?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마주친 풍경, 처음 먹어 보는 음식 등, 매일 새로운 것들을 만나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느낀다. 처음 만난 홍콩 소녀 안쯔이와 우정을 나누는 내 모습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이다.
안쯔이는 중국에 대하여 갖고 있던 나의 편견을
한 번에 바꿔 놓았다. 공손한 몸짓과 표정으로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태도는 동양인의 미덕을 갖추었고 특히 유창한 영어 솜씨와 그림에 관한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하였다. 4층에서 6층까지 전관을 관람하는 동안 피곤하여 잠깐 쉬고 있으면 안쯔이도 어김없이 내 곁에 함께 앉아 있어 주었다.
퐁피두 센터의 건물은 밖에서 안에 있는 내장을 모두 볼 수 있듯이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옥상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멀리 새하얀 사크레 퀴르 성당이 보이고 바로 눈 아래로 파리의 골목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우리는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서로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온순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 내 딸처럼 예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적은 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긴 적은 드물다. 더구나 젊은 사람이 먼저 다가와서 친구가 되어 준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여행이 끝난 다음에도 안쯔이와는 꾸준히 여행 친구로 서로 소식을 이어가고 싶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당연히 안쯔이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오늘 하루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있었는데 길이 어긋난 듯하다. 나는 안쯔이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안쯔이. 아까 커피를 마시면서 영수증 쪽지에 적어 준 나의 페이스 북 주소가 유일하게 우리를 연결해 줄 단서일 뿐이다. 남편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하염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