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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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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Feb 11. 2024

설날 아침에

설을 쇠면  봄이  온다고 했다. 차례상을 치우고 난 뒤 커피를 마시며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봄날처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거실 밖 화단으로 나가서 지난가을에 수북이 떨어져 지저분해 보이는  낙엽들을 쓸어 모아 깨끗이 치우고 싶다. 설날 아침에 봄을 느끼 다니... 성급함이 오지다.


시어머님이 살아계셨을 때의 설날 아침은 지금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집 앞 골목길은 식구들이 타고 온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비좁아졌고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오랜만에 만난 사촌끼리 어울려 노느라  즐겁다.


주방에서는 다섯 동서들이 분주하다. 큰며느리인 나는 도와주는 동서들이 있어서 한결 편하지만 마음은 더 부산스러웠다. 남의 집 주방이라 손이 서툰 동서들에게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는 그렇지만 수시로 큰엄마 작은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였다.


차례상 앞에서는 꼬마들도 의젓하다. 조상님절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 우리 집안의 제사의식에 따라 어른들이 하는 대로 곧잘 따라 한다.


차례를 마친 뒤, 식사 전에 배를 드려야 한다는 식전파와 식사 후에 배를 해야 되지 않느냐는 식후파의 의견이 달랐지만 시어머님의 짧고 굵은 한 마디, "먹고 하자 " 의견은 통일된다.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관심이 더 많은 아이들은 할머니의 결정을 못내 아쉬워했다.  조삼모사를 알 리없는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뱃돈을 받고 싶었을 것이.


이윽고 서열대로 배를 하고 덕담과 함께 뱃돈을 주고 나면 설날 아침의 소란스러움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자신들이 받은 세뱃돈을 소비하러 큰 놈들은 피시방으로 작은놈들은 동네 문방구로 또래끼리 어울려 나가지만 꼭 뒤처져서 따라나서지 못한 한 놈쯤은 있게 마련, 징징거리며 우는 녀석을 달래고 어르느라 조용할 뻔한 집안이 다시 소란스러워 지곤 하였다.


설날 저녁 썰물처럼 가족들이 빠져나간 집안에서 나 혼자 뒷정리를 하며 생각하곤 하였다. 나도 명절을 저 아이들처럼 즐길 수는 없는 건가 하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일조차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된다. 코흘리개 꼬마 조카들은 이제 장성하여 설날에 큰집인 우리 집이 아닌 각자 자기 집으로 명절을 쇠러 간다. 설날 아침이면 집 앞 골목길에 주차장을 마련할 일도 없고 식구들을 위해 힘들게 음식을 준비할 일은 더욱 없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옆으로 흔들겠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아들과 옛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평화롭다. 이 시간도 멀지 않아 추억이 될 것이기에 오늘을 즐긴다.


지금 밖은 봄인 양 햇볕이 따뜻하지만 내일의 날씨는 또 어찌 변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건 지난 일들 뿐, 한 해 한 해 해가 쌓이면서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답기를 바랄 뿐이다.


설날 아침 나의 바람은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 하루에게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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