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란세대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속박에서 벗어난 감동을 마음껏 쏟아내던 해방의 기분, 그런 기분일 줄 알았다.
추석날 새벽,남편과 함께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갔다.이른 아침 성당을 가면서 전과는 다른 명절의 풍경과 마주했다. 신자들 대부분은 우리와 같은 노부부들이다.
그동안 집에서 차례를 지내다가 올 추석 처음으로 제사대신 미사로 부모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렸다.
두 분모두 세례를 받으셨기에 마음속에 살짝남아있는 아쉬움은 덜 했지만 사십 년이 넘게 제사를 챙겨드렸던 조부님께는 솔직히 죄송한마음이 들었고 내가 왜 아직도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조상님께 쿨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평생을 제사를 위해 사시는 분 같았다. 철없는 우리들은 제사 후 풍요로운 음식이 있어 좋았지만 그건 오롯이 어머니의 희생과 정성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소원은 단 하나 조상님이 자손들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일 뿐, 당신의 수고로움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친정어머니를 보고 자라 선 지 아직 신혼딱지를 떼지 못한 새댁이 시아버님의 제사를 선뜻 물려받았을 때도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다.
지난 사십 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제사를 모신 며느리가 왜 갑자기 탈 제사를 선언했을까?
세대가 바뀌면서 차세대 가족들은 그들만의 울타리가형성된다. 장성한 조카들이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면 웃대인 큰집으로 향하던발길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자신의 부모님을 구심점으로 모이게 된다. 가족의 분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양 명절에 불참하는 가족들이 있다 보니 명절은 각자 지내자는 의견이 나왔다.설상가상, 지난해에는시부모님의 제사를 하루 앞두고 내가 갑자기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그 후로 예전만큼 건강에 자신이 없어졌다
나라고 왜 명절 스트레스가 없었을까? 젊은 시절, 평수가 넓지 않은 아파트에 살 때는명절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추석을 전후로 달력에 붉은 숫자가 연이어 있으면 내 한숨도 길어졌다. 명절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친정집으로 가는 손아래 동서가 부러웠고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며 친척들을주저앉히는 시어머님이 야속했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사는 환상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추석날 아침. 미사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평소처럼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 귀향길 고속도로의 체증과 추석을 겨냥한 물가상승과는 전혀 무관한 나의 일상이다. 예전에 원 없이 겪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느긋함이랄까? 그렇다고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다. 모처럼 헐렁해진 서울의 거리처럼 조금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뿐이다.
오후에는 독립해서따로 살고 있는 아들과 시댁으로 추석을 쇠러 간 딸네 가족들이 올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드는 것도 처음이다. 우리집으로 모이는 친척들에게신경을쓰느라 정작 내 아이들에게는 소홀했던 명절날이었다.
오전에 날씨가 흐려서 보름달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구름을 헤치고 보름달이 둥싯 떠 올랐다. 옥상 발코니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였다.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면 '더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오늘 뜬 보름달은 더욱 커 보인다.
어느 해 추석날도 오늘처럼 이곳 옥상 발코니에서 달님에게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그날의소원역시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니 미흡한 며느리가 안간힘을 쓰며 친정어머니의 흉내를 내고 있었던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참 그렇다. 어쩌면 한때 간절히원하던 오늘이었는데 막상 그 날을 마주하고 보니 별 다를 게 없다.
중요한 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했던 며느리로서의 한가위가 지금껏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고난하기만 한 명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젊은 날 내 집 현관에 즐비한 식구들의 신발이 있었기에오늘 이 한가함이 쓸쓸하지 않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