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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랑발레 증후군환자 보호자시점 1

남편이 쓰러졌다

by 연희동 김작가

~그날의 일기를 여기에 옮깁니다~


D DAY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남편을 쓰러뜨린 바이러스가 어떤 숙주를 통해서 남편의 몸에 들어온 그날. 그 시간으로 나의 기억을 뒷걸음질 쳐본다.


나는 비빔밥을 남편은 육회비빔밥을 시켰다. 백화점 안 식당가에 위치한 이 한식집은 언제나 웨이팅줄이 길다. 이날은 점심시간이 조금 이른 탓이었던지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둘 다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딸아이는 지금 그날의 점심식사를 많이 후회하고 있다. 식사 후 채 이십 분도 안 돼서 내가 급설사를 했고 남편은 다음날부터 설사가 시작되었다. 설사만 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고열을 동반한 장염이었다. 어쨌든 동네 병원에 다니면서 둘 다 설사는 멈추었다. 이날 그 한식집에 우리의 식중독에 대하여 알렸어야 했다.


설사가 시작되고 딱 열흘 뒤, 그 사이 남편의 몸이 많이 쇠약해졌는지 입술 주변에 기포가 생겼다. 헬스장에서 함께 운동을 했다. 숄더 플레스 운동을 하는데 평소 운동을 하던 무게에서 10킬로를 줄였는데도 잘 움직여지지가 않더라고 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고도 했다. 설사 후유증쯤으로 알았다.


그날이 금요일 밤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가기로 하고 우리는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다.


D+


새벽 다섯 시 남편이 침대 머리맡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서지도 걷지도 못한다. 119를 불렀다.

세수는 물론 양치질도 못한 채 구급차에 함께 탔다. 겨우 잠옷만 갈아입었을 뿐. 내가 뭐를 입고 따라나섰는지도 모르겠다. 구급차 안에서 남편은 119 대원이 시키는 대로 팔을 올리고 십 초간 정지하는 동작을 했다. 환자수송경험이 많은 119 대윈에게 물었다. 전형적인 뇌경색 환자와는 조금 다르다고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더구나 의사들은 파업 중이다. 집에서 가까운 S병원은 아예 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D병원에서 보이콧을 당한 뒤 외곽의 C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서둘러 머리와 척추 시티사진과 MRI촬영을 했다. 잠시 후 당직 의사가 검사결과를 알려주었다. 뇌와 척추는 괜찮으니 월요일 신경과 진료를 잡아 줄 테니 그날 오라고 한다. 하지만 점점 몸이 굳어가는 남편을 데리고 어떻게 집에 갈 수 있겠는가 , 의사에게 간호사에게 수없이 사정했지만 응급실 원칙만 주장할 뿐이다.


관장을 요구했다. 설사가 그친 후 사흘동안 변을 보지 못한 남편이 장을 비워내면 혹시라도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근육은 이미 괄약근에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던지 두 번의 관장에 실패하고 급기야 간호사가 직접 항문에 손을 넣어 변을 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남은 처리는 오롯이 나에게 맡겨졌다.


오후 다섯 시, 어쩔 수 없이 사설엠브런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목이 바로 서지 않는다. 온몸이 굳으며 목까지 마비가 와서 침을 삼킬 수가 없다. 오늘 하루 닦아낸 침만 해도 몇 컵은 족히 될 것 같다.


혹시 목으로 물을 넘길 수 있을까 해서 컵에 빨대를 꽂아 남편에게 주었다. 역시 사레에 들렸다. 이런 행동이 얼마나 무지한지 나중에야 알았다.


점점 무너져가는 남편, 119를 불러 다시 아침에 갔던 병원으로 갔다. 이번에는 사위가 함께였다.

오전에 병명을 모르고 퇴원만 강요했던 당직여의사가 바뀌었고 남편이 응급환자임을 한눈에 알아본 다른의사는 급히 신경과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섭외해서 지금의 E대학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때가 밤 열 한시, 남편은 의식은 있으나 몸은 이미 굳어있는 상태였다.


*119 구급요원들에게 감사하다

*병의 원인을 모른 채 시간을 낭비한 응급실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남편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급히 서둘러 준 당직의사가 너무 고맙다

* 남편의 변을 손으로 꺼내 준 간호사, 조금 쌀쌀맞았지만 충분히 이해는 간다.

*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억울함과 분함과 안타까움에 분노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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