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슬금슬금 박을 타기 직전 설레는 흥보네 마음이다. 이 박을 타면 뭐가 나올까... 흥보처럼 보은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문밖에 보물을 가득 담은 택배박스가 도착해 있다. 천천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박스부터 열어봐야겠다.
첫 번 째 보물을 열었다
언박싱을 하자 참았던 흙냄새가 훅하고 숨을 내 쉰다. 며칠 전, 밭에서 금방 캔 마를 사서 보냈노라는 동생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겉모습만 보고 고구마와 감자사이에서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어른의 주먹보다 조금 큰 마는 저 아래 남도지방의 들녘풍경과 동행하였더란다.
억새풀과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섬진강변, 잔 물결에 부딪히는 가을 햇살, 그 곁으로 난 길을 천천히 라이딩을 하는 내 동생의 뒷모습,
들녘에서 뭔가를 캐는 사람들을 보고 멈추어서 물었을 거야. 그것이 산에서 나는 장어라는 '산마'라고 알려 주었을 테고... 정이란 때론 들에서 금방 캐낸 산마처럼 이렇게 투박하고 울퉁불퉁하지만 먹지 않고 바라만 봐도 살이 찌는 그런 걸 거야
두 번째 박에서 나온 보물
요즘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는데 두 번째 박스에서는 금덩이가 와르르르르....
진홍색 대봉감이 박스에 가득하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의 친구가 보내준 가을 선물이다.
25년 전 아파트에 살다기 주택으로 이사 온 나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후회하는 게 있다. 유일하게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대문옆 공터에 어떤 종류의 나무를 심을까 고민하다가 사철 푸른 전나무로 정했다. 그때 그곳에 감나무를 심었더라면... 가을이 되어 이웃집 감나무에 황금빛깔 감이 덩실덩실 열려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감나무를 심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남편의 친구가 보내 준 대봉시는 크기도 빛깔도 어찌나 흐뭇한지. 이웃의 감나무를 보며 아쉬워했던 마음쯤 날려버리고도 남았다.
보내온 감은 깨끗이 닦아서 왕골바구니에 담아 눈이 닿는 곳에 두고 바라본다. 추운 겨울 홍시가 된 대봉시를 하나씩 꺼내 먹으며 남편은 철부지 시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는 홍시처럼 단맛을 품는다.
세 번째 박에서는 어떤 보물이 나올까
고구마, 호박. 상추. 부추. 가지.... 이 많은 것을 나열하려니 숨이 가쁘다. 흥보의 박타령도 이 즈음에서는 자진모리로 읊어야 할 것이다.
남편의 오랜 친구지만 지금은 나와 더 각별한 사이가 돤 친구부부는 밭을 꽃밭처럼 예쁘게 가꾼다. 자로 잰 듯 나란히 열을 맞춰 심어놓은 작물들은 주인의 취향에 맞게 튼실하게 자란다.
여름동안 자신의 밭에서 난 유기농 채소를 꾸준히 보내주더니 서리 내리기 전 마지막 채소들과 함께 고구마를 한가득 보내왔다.
도심의 아파트에 살면서 집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외곽의 밭에 취미로 농사를 짓는 친구내외는 신기할 만큼 농사를 잘 짓는다. 그만큼 정성을 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땀과 노력이 가을 햇살을 받고 따뜻한 정으로 변하여 내 집 현관 앞으로 배달되었다. 이 귀한 보물들로 마음의 곳간을 채운 나는 부자가 된 것 같다.
올 겨울 우리 집에 누구든 손님으로 온다면 나는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와 달콤한 홍시를 곁들인 차를 내놓을 것이다
정이란 이렇게 나눠야 더 돈독해지는 법이다
가을이 몽땅 내게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