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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Jun 28.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03

기억의 소환

03. 기억의 소환


어제는 사고 당일을 기록해 보려고 노트를 끄적이다가 팔이 아파서 노트북을 켰다.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2012년에 기록한 부모일기를 보게 되었다.


시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생활이 좀 힘들었다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시우를 주의력이 부족한 아이로 보았었다. 하지만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엉뚱하지만 생뚱맞지 않고 개성 있고 호기심이 많고 상식이 풍부한 아주 재미있는 아이로 바라봐 주시면서 아이는 자신감을 얻고 주의력 부족이라는 물음표는 완전히 해결되었었다.


시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남편은 7년간의 군생활을 대위로 마무리하고 막 사회로 던져진 시기였다. 우리의 주거와 생활등 경제적인 것들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작은 세탁 편의점을 하며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여러 가지 상황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힘든 시기였다.


시에서 지원하는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자녀양육 관련 상담도 받았고 시우를 미술 치료 프로그램에도 참가시켰다. 시우도 좋아지고 나도 그렇고 모든 상황들이 점차 나아졌다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가... 아니다... 나는 모든 힘들었던 시간들을 너무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글들을 다시 읽어내기 전까지는...


시우가 6학년이 되었으니 불과 4,5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해 약 한 두 달간 작성한 부모 일기를 읽으며 나의 기억 장치에서 사라졌던 아이를 향한 고뇌와 번민 그리고 남편의 전역 후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다시 다가왔다. 그동안 행복에 가려졌던 망각의 시간들이.


나는 정말 놀랐다. 오랫동안  블로그에 일상적인 글을 쓰진 않았었다.

몇 년간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서 뒤를 돌아봐야 할 만한 일말의 이유도 없을 만큼 내 생활은 완벽했었나 보다.

시우가 학교에 입학하고 남편이 군대에서 전역하면서 우리는 군 밖이라는 또 다른 세상에 던져졌고 1,2년간 여러 가지 어려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았고 남편도 또 다른 사회에 적응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7평, 작고 낡은 군인아파트 관사에서 살던 우리는 사회로 나와 더 작고 더 낡은 아파트에서 간신히 전세로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 2년에 한 번씩 전세계약이 돌아올 때 좀 더 큰 평수, 좀 더 나은 아파트로 집을 옮길 수 있었다. 전역 후 크게 위축되었던 남편은 군에서처럼 다시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기본급조차 없던 업계의 영업직 바닥부터 시작하여 두 번의 이직을 통해 7급 공무원 이상의 호봉을 받던 군인 시절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 자리로 스카우트되었고 비록 전세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30평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였다. 

내가 원했던 소박한 꿈들이 모두 이루어진 듯했다. 이 단란한 가정에 더욱 튼튼한 울타리를 치면서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더 환한 미래와 더 큰 행복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랐던 걸까... 

잘못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지금 그 행복의 열차는 선로를 벗어나버렸다... 

내가 꿈꾸던 행복이 그리 크고 이기적인 것이었을까... 



시우가 두 돌 정도일 때 한비가 뱃속에서 8개월쯤이었던 것 같다. 부른 배를 안고 시우를 등에 업고서 힘들게 버스를 타던 어느 날이었다. 나를 보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낳지 힘들게 둘째를 왜 그리 급히 가졌냐고 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나는 시우를 둘째가 태어났던 아기 때부터 큰애 취급을 했다. 시우는 늘 둘째에 비해 너무 큰 아이처럼 보였다. 시우가 원치 않는 오빠가 되었을 때 시우도 아기라는 걸 몰랐다. 

한비를 낳고 병원에서 젖을 물리고 있을 때 시우가 처음으로 한비를 보았다. 할머니의 손을 놓고 바로 주먹을 쥐고 한비에게 달려들었다. 

시우와 한비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강력한 적대심과 분노로 시작되었다.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는 내내 한비를 시우한테서 보호해야 했다. 한비를 재우면 문을 닫고 시우와 분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동생에 대한 질투가 심한 것 우리 시우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남매건 형제건 두 살 터울이건 연년생이건 우리 애들처럼 안 싸우는데 왜 우리 아이들만 렇게 나를 힘들게 할까... 아이들이 어릴때는 26개월 터울의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이 많이 버거웠다. 

아이를 키우는 게 전혀 힘들지 않다는 엄마들이 미웠다. 

매일 아이들에게 소리치고 동생을 미워하는 시우를 혼냈다. 몸은 너무 피곤했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과 내 계산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는 나를 비참하게 했다. 

저절로 엄마가 되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미성숙한 엄마였고 무지했다. 

모든 문제는 나는 똑똑한 사람이니깐 엄마 역할도 잘 할꺼라는 자의식에 꽁꽁 묶인 철없던 내가 시우를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였던 거였다. 

왜 그때 시우를 더 사랑해주지 못하고 더 안아주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봇물처럼 밀러 든다.


시우와 한비는 그렇게 태어나 처음 만나던 날부터 앙숙처럼 부딪혔다. 힘으로 동생을 괴롭히고 미워하는 것 때문에 많이 혼이 났다. 엄청 싸우고 질투하면서 주로 질투는 시우가 했고 같이 때려도 시우가 크니까 항상 한비가 당한다고 생각했었다. 

시우 특유의 낙천적이고 느긋한 성격은 빠릿빠릿하고 눈치가 빠른 한비와 대조되었고 많은 경우 시우가 억울하게 혼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시우가 학교에 가고 커가면서는 미워도 핏줄이라고 둘이서 치고 박고 하면서도 죽이 맞을 때는 또 엄청 잘 놓고 챙기기도 하고 여느 남매들처럼 지내왔다. 

그렇게 우리집에 가득찼던 바람잘날 없던 두 아이티격거림과 큰아이의 사춘기와 더불어 엄마의 한 옥타브를 넘나드는 하이톤의 잔소리까지 한날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전쟁의 날들이 완전히 종식 되었다. 

어떠한 소리도 남지않고 적막으로만 가득찼다. 


제발 불쌍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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