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형체 없는 그림자들
베어스타운에 갔다. 동생네 가족과 친정부모님과 함께. 아이들 수영장도 데려갈 겸 부모님도 하루 휴가 겸 해서 일박을 예약했다. 여름방학 막바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수영장은 붐비고 있었다.
한비가 수영장에 가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사촌동생 민재와 함께 간다고 하니 신나 했다.
아이는 무릎밖에 오지 않는 유아풀에서만 놀겠다고 한다. 엄마아빠랑 튜브 타고 일반풀에 들어가자고 했더니 아빠가 아무리 목마를 태우고 붙들어도 절대로 수심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자신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물은 무서웠던 것이다.
어쩌면 한비에겐 평생일지도 모르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한비에겐 수영을 배우게 해야 한다...
유아풀에서 사촌동생 민재와 종일 신나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우도 있었으면 셋이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을까' 같이 놀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각종 튜브와 구명조끼 등을 보면서 마음이 복받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내가 주관하고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의지하며 밀려오는 죄책감과 후회를 막아보려 해도.... 그 한순간을 돌려놓고 싶은 욕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날, 그 시간의 되감기와 재생버튼이 수없이 반복되어 눌러진다.... 돌아가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깊이를 모르는 진창으로 빨려 들어간다.... 왜 빨리 보지 못했는지....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긴장 없이 있었는지... 내게 유죄를 내리고 싶다고 나를 옭아맨다.... 왜 제 아들 시우를 데려가셨나요... 당신은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신데... 제게 내리신 벌인가요... 왜 제게 이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이 일을 통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고통과 비탄에 빠진 저를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저여야만 합니까
온 가족이 모인 화면 안에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화목한 자리에서 시우가 사라졌다.
총천연색의 화려했던 세상이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했다.
우연히도 우리가 배정받은 빌라콘도가 지난겨울에 시우와 함께 왔던 객실 바로 위층이었다.
2월이 끝나가는 막바지 스키시즌에 눈이 엄청나게 왔었다. 우리 넷이 스키를 종일 신나게 타고 친한 가족들과 이 콘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인공눈이 아닌 완전한 진짜 눈에서 감동하며 스키를 탔던 그날이 떠오른다.
스키장이라 그런지 매일 갱신되는 폭염특보가 내려진 날이었음에도 막상 저녁이 되니 밖은 에어컨을 튼 것 같은 상쾌한 밤바람이 불었다.
신랑과 나, 둘이서 스키장입구 타워콘도 쪽으로 나갔다.
아이들과 사진을 많이 찍었던 겨울의 크리스마스 대형트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 먹던 푸드코트 앞 벤치, 한비와 시우 둘 다 자기 몸만 한 스키부츠 가방을 메고서 수없이 오르내린 주차장 앞 계단, 스키를 신고 벗던 렌털 샾 소파 위, 시우가 스키강습을 받기 전 기다리던 그 자리, 이제 멈춰 있는 리프트,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시우의 그림자가 서 있다.
온통 흰색이었던 슬로프가 눈부시게 새파란 잔디로 뒤덮인 모습에 나는 또 아팠다. 계절이 지나고 다시 돌아올 겨울을 시우 없이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
지난 긴 겨울 주말마다 이곳에서 우리 넷이 함께 지낸 시간들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작년에 처음으로 스키회원권을 사고 온 가족 시즌권을 끊어서 네 식구가 함께 스키를 타게 되는 시절이 자신에게 온 것을 너무 감격스러워했었다.
시우에게 스키를 가르치고, 함께 타고, 아이의 실력이 느는 것을 바라보던 남편은 이제껏 내가 본모습 중에 가장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묻기도 상상하기도 두렵다.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돌아섰다.
겨울이 오는 게 두렵고 떨린다.
그 계절을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남편은 또 얼마나 아플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행복을 누릴 시간들이 좀 더 필요하다.
이것으론 절대 충분치 않다.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