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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Jul 16.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12

울고 나면 다시 웃을 수 있기를

12. 울고 나면 다시 웃을 수 있기를



전셋집을 다시 구해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계약만료에 집주인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집값이 싸다고 서울 근교에서 이사 들어온 집들이 많았던 이 경기 외곽의 전세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세입자가 깨끗하고 좋은 집을 골라서 들어가기란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아니 전세 물권 자체가 소광 상태라 전세 날짜를 맞출 수 있는 매물이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전날 운 좋게도 지금 사는 전셋집을 계약했던 부동산과 연락이 닿았고 덕분에 우리가 사는 동네의 새 아파트(8년 정도 지만 20년 이상된 아파트에만 살아 본 우리 기준엔 거의 새 거인 거나 다름 없는)를 계약하게 되었다. 그 집을 보려는 대기자가 일요일에도 줄을 섰다는데 그중 우리가 집을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이다. 보자마자 결정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세입자가 있는 집인데도 너무 깨끗했고 7층 거실 전망이 막힘 없이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전세가가 기존 살던 집 전세가의 두 배다. 전세금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지만 전세자금 대출이자는 저리였기에 싼 월세를 산다고 생각하기로 하자는 남편의 강한 설득으로 엉겁결에 바로 계약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은 지금 사는 아파트 전세 계약이 끝나면 꼭 동네의 가장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겠다고 말했었고 결국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2년 전에 20년이 넘은 아파트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살게 되어 감격했었는데 새로 계약한 아파트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쾌적하고 넓은 지하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로 집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홈시스템에서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를 집안에서 cctv로 확인하는 것, 전기나 수도요금도 하루하루 조회가 되는 것, 확장된 방과 베란다에 바람 한점 들지 않는 짱짱한 샷시, 시스템 드레스룸, 욕실과 분리된 파우더룸과 세면대까지 모든 것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고급이었다. 

이젠 좋은 콘도나 숙소를 가도 크게 감흥이 없을 것만 같은 이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세 계약을 한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있다가 한비를 재우고는 결국 남편과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걱정했던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 대한 안도와 시우와 함께 지나온 추억들 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과 슬픔이 몰아쳤다. 술기운에 더해진 남편의 눈물을 보니 나 또한 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만 해도 그 오래된 저층 아파트를 벗어난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내 집도 아닌 전셋집인데도 내 집 장만한 듯 그렇게 좋았다.

겨우 두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면서 다 잊고 있었다. 신혼 초부터 7년간 살던 여러 곳의 오래된 군인 아파트는 겨울마다 너무 추웠다. 도시가스가 아닌 기름보일러나 lpg가스라 비용 때문에 난방을 따듯하게 할 수 없었다. 열몇 평 남짓한 아파트에 난방비가 아껴야 월 20만 원씩 나왔고 신생아가 있는 집에서 몸조리를 한다고 따뜻하게 트는 집은 4,50만 원의 난방비 폭탄을 맞는 집도 있었다. 겨울에 따뜻한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게 그 당시 큰 바람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이들은 겨울에 할머니댁이나 다른 집에만 가면 양볼이 붉게 상기되어 덥다고 난리를 쳤다. 만화나 동화에서 묘사하는 시골의 볼 빨간 아이들 같았다. 잘 때도 항상 내복 위에 옷 한 벌을 더 입고도 춥던 겨울이 어느새 과거가 되어 있었다. 환경이 사람의 기억을 얼마나 쉽게 망각시키는지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새삼 느껴진다.


내가 꿈꾸던 소박한 소망은 네 식구가 30평대 아파트(지방이든 도시든 그저 우리 넷이 함께 할 보금자리로의 공간)에 살면서 남편은 평범한 직장에서 가끔 가족여행 정도는 다닐 수 있는 월급을 받으며 나는 아이들을 잘 케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이자 일로 자아실현도 하고 약간의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정도의 일을 하며 아프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이었다.  그런 것들이 이제 거의 실현되는 것 같았다. 더 큰 욕심 같은 것도 없었다. 서울의 아파트에 꼭 입성해야 한다거나 값비싼 명품이나 물건들을 너무 갖고 싶다거나 남편이 회사에서 임원 정도는 되야한다는 사회적인 성공이나 어떠한 형태로의 큰 부를 소망하지 않았다.

그 '평범한 삶' 이란 게 너무 큰 욕심이었던 걸까...왜 이만큼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으신 걸까...


시우가 같이 있었다면 오늘을 더 기뻐하고 좋아했을 텐데... 그랬다... 어려웠던 시간들이 지나고 좀 더 기쁜 일들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프다... 조금씩 우리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는 순간이 올 때... 우리 시우가 너무 보고 싶어 진다는 그 마음뿐다... 우리가 흘린 눈물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행복한 순간 우리가 지금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다음날 아침 퉁퉁 부어버린 서로의 눈바라보며 놀리며 웃어버렸다.


울고 나면 다시 웃을 수 있기를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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