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에 관한 이야기 "프롤로그"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직업을 얘기하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장소와 이미지가 있다. 가령 의사라고 하면 병원과 청진기를, 교사라고 하면 학교와 칠판을 떠올린다. 변호사, 경찰관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나 쉽게 짐작한다. 하지만 나의 직업인 사회복지사는 어떨까? 내가 사회복지사라고 이야기 할 때 반응은 아주 다양하다. 시어머니는 “아픈 노인들 보살피느라 힘들겠네”라고 하시고, 어떤이는 “공무원인가봐요?”라며 궁금해하고, 또 어떤 이는 “남을 위해 봉사하느라 애쓰네”라고 한다. 일일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기 힘들고, 듣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다.
사람들이 잘 떠올리지 못하는 ‘사회복지사’라는 일을 나는 왜 하게 된 것일까? 누구는 투철한 사명의식, 이타심으로 사회복지사를 꿈꿨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딱히 꿈이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입시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진학했고, 앞으로 고령사회를 대비한 노인복지가 전망이 밝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먹고 사는데 어려움은 없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공부와 경험을 하면 할수록 다양한 전문지식과 기술이 요구됐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에 대한 신념이나 사명의식이 없다면 이 일을 오래하기 어렵다는게 그간 내가 갖게 된 생각이다.
나는 사회복지학과를 주전공으로 하고, 사람을 대면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관련성이 높은 심리학을 복수전공했다.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서는 4년 동안 학과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한 달 간의 실습(120시간 이상)을 필수로 해야 했는데 내가 실습한 곳은 아동전문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종합사회복지관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체험기회를 제공하는 1박 2일 캠프와 단체 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독거어르신 도시락배달 지원을 위해 초기 상담을 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 경험이 현장 적응에 유리하다고 하여 아동 멘토링, 장애인생활시설 활동보조, 프로그램 진행 보조도 꾸준히 하였다.
봉사활동하면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장애인생활시설 활동보조를 했을 때였는데 1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직 사회복지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1학년 2학기에 친구들 네 명과 함께 대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애인생활시설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다른 친구들은 장애아동들이 주로 머무는 공간의 활동을 지정받았고 나는 남성들이 머무는 공간을 맡게 됐다. 뇌병변, 자폐 등이 주된 장애였는데 나의 역할은 장애인들이 저녁 식사를 할 때 옆에서 보조하는 일이었다. 주 1회 봉사활동을 했고 네 번째 갔을 때 내가 맡고 있는 방의 담당자는 나에게 생활인들의 목욕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내가 흠칫 놀라자 본인도 여성인데 이런 일은 남녀구분 없이 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며 성인 남성의 목욕을 같이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하기 싫다고 하면 이런일도 못하면서 무슨 사회복지를 하겠다는 것이냐고 나무랄 것 같아서 마지못해 목욕을 도왔다.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엄연히 성인 남성이었고 나이도 나보다 서너살은 많다고 했다.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 너무 무섭고, 놀랐기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발가벗은 성인 남성의 몸을 강제로 본 수치스러운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명백하게 장애남성과 나의 인권을 침해한 일이었다. 그 때의 기억으로 나는 장애인분야를 기피하게 되었고, 나에게 목욕을 부탁한 생활복지사도 오랜 시간 원망했다.
물론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멘토링 했던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은 부모가 이혼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늘 자신감도 부족해보였고, 학업성취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 나는 사회과목을 맡아서 1시간씩 멘토링을 했는데 교과서 내용 중에 어떤 것이 시험에 잘 나오는지, 무엇을 암기해야 하는지 요령을 잘 설명해주고 매 시간 복습 후 진도를 나갔다. 사소한 것이지만 칭찬도 아낌없이 해주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주며 학생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했다. 또한 일하기 바쁘고 무뚝뚝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학교생활, 교우관계의 어려움들을 상담 해주며 1년 이상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20~30점 받았던 사회과목 점수를 79점 받아왔다. 한문제만 더 맞췄더라도 80점이 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볼 때 공부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나는 여러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복지가 단순히 자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영역에서의 공백을 채워주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는 것을 느꼈고, 내가 타인과 어떤 ‘관계’로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삶에, 혹은 타인의 삶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만큼 책임감도 가지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봉사활동, 실습, 동아리 활동 등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바쁜 4년을 보내고 졸업 후에 치러지는 사회복지사 1급 국가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했고, 다행히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1970년에 제정된「사회복지사업법」이 1983년에 개정되면서 사회사업종사자의 명칭이 ‘사회복지사’로 규정되었고 사회복지사를 1, 2, 3급으로 등급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자격인정시험 없이 자격증을 교부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1급 사회복지사의 전문적 자격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1999년에 사회복지사 국가시험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에 등급별 자격기준이 설정되고, 사회복지학 전공 교과목, 국가시험 교과목의 규정이 만들어졌고, 2003년부터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은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교부되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사회복지사 정책/제도 부분 인용) 이렇게 법으로 사회복지사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고, 내 주위의 대부분 사회복지사들이 1급 자격증을 가지고 현장에 나와서 일하고 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난 후 ‘난 1급 자격증도 있으니 바로 취업할 수 있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여러 군데 입사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 실제 현장에서 마주쳐야 하는 문제에 대한 대처를 질문 받을 때면 ’그렇게 힘든 상황에 놓이는 게 이 일이구나‘ 난감하기만 했다. ’사회복지는 내 길이 아닌가보다‘ 라고 낙심하며 포기할 정도로 숱한 시험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서울의 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 거주자인 내가 서울의 복지관으로 출퇴근하는데는 지하철과 버스로 하루에 최소 3시간이 소요됐다. 밀려드는 사람과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려는 사람들 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그 시간을 8년간 버텼다. 결혼 후 직장과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구했기 때문에 지옥철을 빠져나왔지만 입사 후 1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입사한지 5개월 남짓 되었을까? 지하철에서 숨이 막힐 듯 식은땀이 흘러 출근길이 점점 더 힘들어지자 빈혈이겠거니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봤는데 “공황장애인 것 같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그 당시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직속 과장님께 “과장님, 저 병원에서 공황장애래요”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전했나보다. 과장님은 깜짝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게 아니야”라며 작게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아픈 것을 이야기 하는게 잘못된 것이구나, 기관에 피해가 가는 일이구나, 내가 알아서 조용히 해결해야겠다”
공황장애는 아마도 사회초년생 사회복지사가 노인여가문화사업을 맡으면서 이미 복지관을 10년 이상 다니는 어르신들과 오래 근무한 베테랑 강사들의 텃세를 경험하며, “아가씨”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취급에 대한 스트레스로 생긴 병일 것이다. 선착순으로 마감하는 교육의 경우, 미처 등록하지 못한 분들이 간혹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 욕설을 하기도 한다. 또한 대면해서 민원을 처리하는 일이 많다보니 매일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밀린 행정업무는 야근으로 채우는 일상속에 내 몸과 마음은 병들어 있었다. 초등학교때부터 체력 하나는 1등이었고, 대학교때는 체육학과와 피구 결승까지 할 만큼 건강에는 자신 있었는데 공황장애라니.. 치료할 시간과 여유도 없었던 그 때에 나는 지하철 타기 전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속으로 “나는 안전해, 이렇다고 해서 죽지 않아. 금방 도착할꺼야”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중간 역에 내려 의자에 앉아 쉬고, 다시 지하철을 타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버텼다. 그리고 의자에서 쉬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업무에 적응이 되었고 공황장애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 후 종합사회복지관의 특성상 몇 번의 업무 로테이션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업무를 경험하게 되면서 10년 차의 내공이 생겼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직장과 집이 가까워 야근을 해도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회복지사는 기본적으로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후에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마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상담하는 주민들이거나 잠재적인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직장과 집이 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고, 주위를 살피게 된다. 어떤 선생님은 너무 피곤해서 버스 노약자석에 앉고 싶을 때가 많지만 본인이 상담하는 주민을 버스에서 만나게 될까봐 일부러 자리가 있어도 서서 간다는 얘기도 하고, 중년남성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하는 사회복지사는 사적으로 연락을 시도하는 남성이 집까지 따라올까봐 몇 번을 뒤돌아서서 확인하고 귀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럴 때는 집이 멀리 있는게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글 재주가 없는 내가 어설프게 글을 써보겠다고 나선 이유는 프롤로그에서 다 담지 못한 사회복지사로서 겪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다. 사회복지사의 현장은 사회복지 일반의 문제, 복지의 전달체계 속에서 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고 부대끼는 일상의 모든 시공간이다. 여기서 벌어지고 겪는 일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당신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어쩌면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킬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다소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왕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용기내어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