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올 해의 EATFLIX(2021. 11)
나는 자주 망한다. ‘귀찮음’이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계획하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오늘까지만, 그리고 내일부터”가 인생의 모토인 사람처럼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을 내일부터로 바꾸고, 오늘까지만 대충 살고, 내일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많은 오늘을 살아간다. 이 원고도 오늘, 아니 어제 썼어야 했는데 오늘 쓰고 있고, 마음 같아선 내일로 미루고 싶다. 그렇게 나의 한 해는 대체로 망한 하루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 하루들이 모여 2021년이 됐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볼 거 없이 올해의 계획과 다짐들 역시 분명히 망했다.
그러나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진 못했지만 적잖이 밥벌이는 하고 있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진 못했으나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건 아니고.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만... 아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 어쨌거나 망한 오늘을 보내고 내일은 또 오고, 계획한 것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도 새로운 한 해는 온다. 그래서 또 망쳐버릴진 몰라도 일단은 다소 설레고 희망적이게 ‘내일부터’를 다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완벽히 망하진 않았다.
분명히 망한 것 같은데 완벽히 망하진 않은. 오늘을 버리고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시절, 연말이 왔다. 끝나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기대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한 두 달을 대충 보낼 수 있는 시기. 이럴 때야 말로 실컷 먹고 놀고 보는 절호의 찬스다. 잃었던 초심은 내년부터 되찾으면 되니까. 보다 즐겁고 희망적인 내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본다. 고다르의 영화가 아니라 윤성호 감독의 영화 혹은 TV 시트콤이다. 진짜 특이한 그레이트혁권과 그의 매니저 재민의 이야기. 제대로 된 사람과 하루는 없지만 즐겁고 유쾌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오늘이 아니라 내일까지 망쳐버려도 상관없겠다 싶을 만큼 재밌다. 그들도 이토록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는데, 우리의 망한 하루 혹은 한 해쯤 어때?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마지막화에서 전처의 전화를 받으며 재민을 위로하는 알바생 희본은 ‘우주가 무한한 것 같지만 실은 유한하다. 150억 년 전에 그 어떤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태어났으니. 150억 년만 기다리면 모든 헤어졌던 만물이 결국 다시 만난다는’ 헛소리를 한다. 150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 만물은 만나게 된다. 사람도 내가 계획했던 날도. 그러니 망했거나 망해가는 날을 슬퍼하지 말고 마음껏 맛있는 걸 먹고 재밌는 것들을 보자.
토마토 치즈 케이크
토마토는 그냥 먹는 게 좋다지만 뭘 넣어서 먹는 건 더 좋다. 토마토 속에 바질치즈를 가득 채워 향긋하고 달콤하게 오늘은 좀 망해도 괜찮다 말한다.
스마일카레
평범한 카레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다. 먹기도 전에 우와! 하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어떻게든 웃고 나면 망한 하루도 절반은 성공인 셈이다.
미스 리틀 선샤인
망해 보이는 콩가루 집안의 막내딸 올리브, 미인대회에 나가는 것이 꿈이지만 평범한 외모에 통통한 몸매다. 이 어린 소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며 펼쳐지는 이야기. 내년부터는 올리브처럼 살자.
청담동 살아요
망했지만 내 마음속에 망하지 않은 시트콤. 실제로 망한 혹은 망해 보이는 가족이 우연히 청담동 한 빌라에 살게 되는 이야기. 내년부터는 김혜자 같은 사람과 함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