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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Aug 09. 2020

나는 비관론자입니다.

[번외편 5] 안 될 거라 하지만, 진짜 안 되길 바라는 건 아니고요.


오늘은 모처럼 장난기 싹 빼고 거창하게 사유와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씐이 난다 씐이 나!!

(feat. 어색한 경어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엔 그럴싸하게 붓글씨로 써 붙여놓은 가훈(家訓)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한자로 운까지 맞추어 쓴 거라 정확히 어떤 글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뜻은 대략 “긍정적으로 보고, 말하고, 생각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정도였던 것 같군요.


세상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조무래기 시절엔 어차피 해석도 안 되는 괴상한 한자어 따위 아무래도 관심 없었습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지면서 이 한자어에 담긴 속뜻을 깨우치게 되었고, 그때부턴 우리 집 가훈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유 없이 까칠해진 마음으로 애먼 데 딴지를 걸었던 건 아닙니다. 정말로,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였죠. 일단,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겁니다. 죽을 고비 넘겨가며 드래곤 볼 7개를 다 모아도 소원은 많아야 3개만 이루어지는데요. 온갖 노력을 다해도 원하는 것 하나 이룰까 말까 한 것이 눈앞에 직면한 현실인데, 그냥 덮어놓고 긍정 또 긍정만 하면 공짜로 홍복(洪福)이 찾아온다는 식의 희한한 훈화 말씀에는 도무지 수긍이 안 되더라고요. 차라리 “긍정적으로 보고, 말하고, 생각한다 해서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가 우리 집 가훈이었다면 무릎을 치며 찬동했을 것 같습니다.


흠 잡힐 일 없으리라 여겼던 가훈에 뜻밖의 비수 같은 평론이 날아들자 부모님은 물론 매우 못마땅해하셨고, 그날부터 당신 자식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교정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 부모 맘대로 되는 자식은 많지 않은 법이죠. 우리 집 가훈이 참 좋은 의미인 건 알겠는데, 어째서인지 살면서 무언가 갈림길에 서게 되면 비관론이 그렇게 당기더라고요.


비관론자는 대개 환영받지 못합니다. 경우에 따라 투덜이, 시비꾼, 아웃사이더 등으로 내몰려 무리에서 소외되기도 하고, “왜 항상 불만이냐.”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는 사람도 있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관론자는 “잘 될 거야.”라는 밝고 따스한 분위기에 불쑥 끼어들어 “잘 안 될 거 같은데?"라며 냅다 찬물을 끼얹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미운털 예약인 거죠.


하지만, 희망찬 내일을 기약하는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가신 반동분자' 취급을 받자니 비관론자 입장에선  꽤나 억울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죠. 알고 보면  비관론은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 다릅니다. 비관론자라고 해서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의 길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비관론을 택했다 해서 세상만사에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무조건 안 된다 단정해 빠른 포기와 패배주의를 종용하는 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에게 일단 후한 점수를 주곤 합니다. 설령 그 사람이 보인 긍정이나 낙관에 아무런 근거가 없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낙관적인 모습 자체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평가받는 거죠. 아시다시피 낙관과 비관의 대립은 무언가 바람을 가졌으나 그 실현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이때 낙관론은 불안 투성이 마음에 희망과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어쩐지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갖게 하고 자연스럽게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죠. 그래서인지 낙관론에 대한 추종은 종종 ‘긍정의 힘’이라는 마법 같은 신념으로 변신해 번뇌 가득한 속내에 의지의 불씨를 던져주기도 하고요. 확실히 낙관론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이해합니다. 그럴만하다는 것도 인정하고요.


하지만, '긍정'이나 '낙관'이 모두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어떤 힘을 가진 주문처럼 느껴지더라도, 한 걸음 물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사실 '긍정의 힘'이란 '결과론에 입각한 자기 합리화'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잘 될 거야"라고 믿었더니 정말로 잘 되었다면 '결과적으로' 그 긍정은 힘을 발휘한 셈이지만, "잘 될 거야"라고 믿었음에도 잘 안되었다면 '결과적으로' 그 긍정은 고통을 배가(倍加)시킨 셈이니까요. 어쩌면 ‘긍정의 힘’이라 새긴 동전의 뒷면에는 ‘희망고문’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면, 낙관론자라 해서 뭐든지 잘 될 거라 믿고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건 아니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습니다만, 그건 사실 비관론자도 마찬가지거든요. 비관론자라 해서 뭐든지 잘 안 될 거라 믿고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비관론자는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이 좀 다른 거죠. 비관론자는 남 보다 좀 더 신중한 타입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남 보다 좀 더 겁이 많은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패가 불확실한 일을 대할 때면 성공의 영광보다 실패의 비애를 먼저 떠올리고 걱정하는 사람이죠. 영광은 한 박자 늦어도 누리고 즐길 수 있지만 비애는 미리 염려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비관론자가 무언가 확신을 가지려면 그에 걸맞은 확실한 근거를 원합니다. 만약 확신이 들 정도의 근거가 없다면 '현재로선 실패'를 가정하고, 다만 그 가정을 뒤엎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혹은 실패 후의 뒷감당이라도 미리 대비해둬야 안심하는 겁니다.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둘이 탄 비행기가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엉금엉금 비행기에서 탈출해 하나 남은 수통을 열어보니 물이 반쯤 들었습니다. 그러자 낙관론자는 물이 반통이나 있다며 밝은 표정을 짓고 비관론자는 물이 반밖에 없다며 울상을 짓더라는 이야기 다들 아실 겁니다. 둘의 상황 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건 잘 알겠고, 궁극적으로 결말을 좌우하는 건 각자 다음 행동이 무엇이냐는 건데요. 반이나 남은 물통만 믿고 더 이상 물 찾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반밖에 안 남은 물통에 좌절해 더 이상 물 찾기를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모두 죽을 겁니다. 반대로 물 반통에서 희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물을 찾아 나선다거나, 물 반통에서 불안을 느끼고 다급히 물을 찾아 나선다거나 한다면 두 사람은 모두 살 수도 있겠죠.


결국, 비관론자도 궁극적으로는 모두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죠. 비관론자도 해피 엔딩 좋아합니다. 새드 엔딩은 누구나 괴로운걸요.


나는 비관론자입니다. 늘 잘 안 될 거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잘 안 되기를 바라는 건 결코 아니죠.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밝은 내일을 말하며 희망에 젖어있더라도, 누군가 한 명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는 어두운 내일을 생각할 필요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느 관점이 맞는지, 혹은 어느 관점이 바람직한를 따지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는 가장 나다운 사람이고 싶어서 비관론자가 되었습니다. '나'로 살다 보니 어쩐지 비관론자의 역할이 내게 맞는 거 같아서 스스로 걱정인형이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할까요. 때로는 비난받고 때로는 배척되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위성처럼 공전하지만 알고 보면 나는 세상에 혼재된 가치관들이 균형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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