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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저녁 Oct 30. 2020

오빠랑 얘기하는 게 제일 재밌어

효리언니 한마디에 심란했던 나날들


사랑에 있어 대화는 얼마큼 중요한 걸까. 우리는 대화를 통해 사랑하고 대화를 통해 화해한다. 살면서 수도 없이 내뱉은 “대화가 안 통해”라는 문장은 종종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하고, 마음에 차가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이들이 많은 거겠지. 외향이나 취미 모든 면에서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과 대화 쿵짝이 맞을 때, 나도 모르게 이성적 호감을 느꼈거나 이참에 어디 한번 호감을 느껴볼까 마음먹었던 경험, 나만 있는 건 아니라 믿고 싶다.


일단 난 대화의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편이다. 리드미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에게 무한 애정을 준다. 학창 시절 주변 평판이 좋지 않은데도 유독 나와는 잘 지내는 친구가 있었고, 반대로 주변 평판은 좋은데 유독 나하고만 사이가 먼 친구가 있었다. 모두 다 ‘대화의 주파수’가 맞냐, 안 맞냐 차이였다.


몇 해 전 가수 이효리가 방송에서 남편 이상순에게 “오빠랑 이야기하는 게 제일 재밌어. 오빠랑 이야기하려고 결혼했는데?”라는 말을 한 적 있다. 그 말에 짐짓 심란해졌다. 이효리의 말에 ‘나도, 나도’ 할 수 없어 쓸쓸했다. 그 누구보다 ‘잘 통하는 대화’에 굵게 밑줄을 긋는 나지만, 이 남자와 이야기하려고 결혼하고 싶진 않았거든. 사실 난 남편과의 대화가 재밌어진 지 얼마 안 됐다. 아직도 남편과의 대화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아마 남편도 그러하겠지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어느 여름날 동네 카페에서였다. 내가 아빠가 입원한 이야기를 한창 조잘대던 중이었다. 남편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귀는 닫혀 있었다. 본인 이야기할 틈을 찾기 위해 뇌를 풀가동 중인 것을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자기 지금 다른 생각하지. 네 얘기하려고 준비 중이지.”

남편은 간밤 몰래 라면 끓여 먹다 들킨 사람의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눈빛은 흔들리고 입은 꿈틀거리고 있는데 무얼. 남편이 하려던 이야기는 아버님께서는 보험 무용론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여자친구 아빠 다침→우리 아빠는?→우리 아빠는 보험 절대 가입 안 함’ 이런 알고리즘을 머릿속으로 그린 거다.     


지금도 남편은 내 말을 끝까지 잘 안 듣는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다. 문제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가 “오늘 저녁으로…”라고 운을 떼자마자 “오, 좋지”라고 말한다. 연애 초반엔 이게 죽도록 싫어서 남편이 말을 끊으면 “아냐, 됐어”라며 입을 닫곤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좋은 건 아니지만.


한번은 남편의 절친과 셋이 만났다. 이 절친은 남편보다 천 배 정도 말이 더 많았다. 엄청난 양의 이야기를 단숨에 쏟아내고 있는데 이때도 남편이 친구의 말을 자꾸 끊는 거다. 이 친구는 남편이 말을 끊거나 말거나 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리스펙트! 남편이나 남편 친구나 참 대단하다 느꼈다.


남편과 나는 대화의 주파수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나의 개그가 어떤 포인트에서 웃어야 하는 건지 남편에게 설명하는 일이 잦다. 남편 역시 이 유튜브 영상이 얼마나 배꼽 잡게 웃긴 건지 내게 브리핑해주는 것이 일상이다. 뭐, 비단 유머뿐만이 아니더라도 대체로 안 맞고 전반적으로 엇박자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좋다. 안타깝게도 나와 남편의 대화는 그렇지 않다. 남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연애 시절 내가 발광하며 남편에게 싸움을 걸었던 날은 모두 대화가 유독 안 통했던 날이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이보다 대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모두가 속는 친구의 거짓말을 귀신같이 눈치채곤 했다. 이야기를 듣고, 글로 쓰는 일이 직업이 되면서는 이 레이더가 더 예민해졌다. 화자가 은근하게 숨긴 날카로운 마음이나 질투 혹은 따뜻함 같은 것을 빨리 알아챘다.


남편을 만나기 전, 다 필요 없으니 착한 사람과 결혼하라고 거의 주문을 외우듯 신신당부했던 선배가 있었다. 한 모임에서 친해진 선배였는데, 우리가 이렇게 깔깔거리며 잘 지내는 것은 기껏해야 한 달에 몇 시간 보는 게 다라서 그런 것이라 했다. 이 모임에서 위트 있고 잘 통하는 사람도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가 되면 다 똑같아진다고. 자기 남편이 그러했다고. 원래 대화는 남편이 아닌 친구들이랑 할 때 더 재밌는 법이라고. 그러니 부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을 만나라고. 그게 최고라고 말이다.


선배의 조언은 실로 유익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말이다. 대화는 애매하게 안 통하지만 다정하고 착한 사람. 남편을 동호회 같은 곳에서 만나 한 달에 고작 한두 번 만나는 사이였으면 대화가 잘 통한다고 착각했으려나. 온 신경을 서로의 대화에 집중했던 첫 만남을 떠올려보면 아예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닌 듯하다.     


신기한 건 결혼하고 우리만의 대화 카테고리가 신설되었다는 점이다.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세상. 이 카테고리 안에서 우리 둘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대화 메이트다. 둘만 아는 농담에 온 집안이 떠나가라 꺅꺅 웃고, 남들이 봤을 땐 영 시답잖은 일에 세상 진지하게 머리를 맞댄다. 둘만의 세상은 매일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데, 나는 이게 곧 우리 부부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 역시 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수많은 날이 모여 이 세상을 일궜다.


그런데도 내 마음을 남편에게 다 전하지 못한 날이면 하염없이 헛헛해진다. 우리만의 세상에 편입되지 못한 나만의 세상. 남편에게 공감받고 싶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이는 몇 가지 키워드들. 대화가 길을 잃거나 깊어지지 못할 때면 끝없이 아득해진다. 그럴 때면 이렇게 글을 쓰거나 내 마음은 나만이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리곤 다시 우리만의 세상에 풍덩 빠져 안락함을 잠시 즐기기로 한다. 남편이 이해 못 할 나만의 세상이 있는 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면서. 맞춰갈 여지를 조금은 남겨두는 일을 낭만이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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