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문제만큼은 도무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웨딩 화보를 찍은 다음 날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평생의 예쁜 척을 하루 동안 다 쏟아내느라 머리, 어깨, 무릎,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뻐근하게 아팠다. 카메라 마사지의 여운이 아직 남았는지, 내가 봐도 화장 하나는 곱게 된 날이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연예인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끼며 모 연예인 인터뷰 일정을 소화하던 볕 좋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고 마감을 위해 근처 카페로 향하는 길. 왠지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아빠는 3년 전부터 일 년에 절반은 파주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몇 해 전 팔과 다리를 연이어 다쳐 자의 반 타의 반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노느니 뭐하냐며 일자리를 구한 곳이 파주에 있었다. 쉬엄쉬엄해도 되는 일이었고 넓은 사택에서 소소하게 밭을 가꾸며 지낼 수 있었기에, 적적하지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아빠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고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아이고, 우리 딸내미”라며 다정하게 전화를 받는 아빠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의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주의는 100%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인데, 이날은 아빠의 용건만 간단히 주의가 유독 더 강하게 느껴졌다. 할 말 없으면 끊으라는 짜증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고, 나는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빠에게도 내가 모를 골치 아픈 일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 라며 카페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031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 신혼집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여사님~ 신도시 분양 안내해드려요~”라는 광고 전화가 하루에도 몇 통은 걸려왔기에 이번에도 스팸 전화겠거니 심드렁하게 받았다.
“의정부 성모병원 응급실인데요. 김OO 님 따님 맞으시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구의 자전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지러웠다.
“아버님께서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실려 오셨어요. 지금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손이 벌벌 떨리고 눈앞이 노래졌다. 눈앞이 노래진다는 말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란 것을 나는 그날 체험했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광화문에서 의정부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 택시부터 부랴부랴 잡았다.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엄마와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빠가 쓰러져 지금 빨리 의정부로 가야 한다고.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파르르 떨며 울었다. 기사님은 아버님 괜찮으실 거라고, 손님이 정신을 딱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님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위험할 것 같다며, 일단 시술하겠다고 말이다. 시술이 잘못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의정부로 향하는 1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정신으로 버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목 놓아 울며 기도했다. 아빠를 살려달라고, 제발 아빠를 살려달라고.
아빠의 시술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악! 하는 아빠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주저앉았다. 저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빠는 살 수 있을까. 그 순간 남편이 사색이 되어 시술실을 찾아왔다.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풀어졌던 정신을 다잡았다.
‘이제 우리가 부모님을 지켜야 하는구나.’
나는 남편의 존재에 내가 외동딸임을 새삼 환기했다. 피붙이가 아닌 남편이 회사 일도 제쳐두고 한걸음에 달려와 준 사실 때문이었을까. 아, 내가 이제 정말 엄마 아빠의 울타리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져 나왔구나.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런 마음에 더없이 외로워졌다.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아빠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 선생님이 우릴 불렀다. 아빠는 급성 심근경색이었고, 중요한 혈관들이 모두 막혀 언제 쓰러져 급사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시술 중 한차례 심정지까지 찾아와 심장의 많은 부분이 괴사했다고도 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는데 수일 내에 또 위험한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러줬다.
뒤늦게 병원으로 온 엄마가 엉엉 울었다. 나는 차마 울 수 없었다. 내가 울면 이 모든 게 악몽이 아닌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밥을 먹자고 했다. 아빠 시술이 잘 돼 정말 다행이라고, 우리 아빠 명 한번 길다고. 엄마의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엄마가 반찬을 짜게 만들어다 줘 아빠가 아픈 것 같다며 우는 엄마. 괜히 아빠에게 파주 일자리를 알아봐 줘 아빠가 쓰러진 것 같다며 아이처럼 우는 엄마. 사실 나는 아빠가 아픈 게 꼭 내 탓 같았다. 결혼도 전에 신혼집에 먼저 들어간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아빠와 하루라도 더 같이 있을 걸, 같이 밥을 먹을 걸.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아빠는 쓰러지던 날, 그러니까 오후에 나와 통화했을 때 6개월간의 파주 생활을 마무리하고 신림동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빠는 농사지은 채소와 고춧가루, 옷가지를 쌀 포대와 배낭에 한가득 담아 들고 땡볕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위나 딸에게 부탁하기 미안해서 혼자 무거운 짐을 들고 올 생각이었던 거다. 그러다 급체한 듯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파 119를 부르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고 아빠가 뒤늦게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들 그 누구도 아빠를 도와주지 않았단다. 대낮의 취객이겠거니,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모른 체했다는 아빠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시술을 끝낸 아빠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아빠는 여러 번 위기를 넘겼다. 물고문 받는 것처럼 밤새 숨이 넘어가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었단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가는 중환자실. 칠십 평생 의정부라고는 와본 적도 없는 우리 아빠가 그 멀고 먼 낯선 병원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신혼집과 의정부를 오가며 아빠를 돌봤다. 중환자실 환자에게 허락된 면회 시간은 단 20분.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엔 정말이지 누구라도 붙잡고 오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빠는 보름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다 겨우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도 숨이 차올라 매일 밤 고생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는 아빠의 상태를 살피며 밤을 지새웠다. 병원 간이침대는 좁고 딱딱했다. 아빠와 손을 잡고 신부 입장 할 수 있을까, 아빠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본 우리 아빠인데. 우리 아빠, 누리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은데. 벼랑 끝에 몰린 듯 무서운 밤이 지나고 나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깨보면 퀭한 얼굴의 아빠가 TV를 향해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나는 전쟁 같은 밤이 무사히 지나갔음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나는 매일 밤, 아빠가 쓰러졌다는 전활 받은 그날이 떠올라 쿵쾅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곤 잔다. 지금까지 나는 매일 밤, 의정부 병원에서의 밤들이 떠올라 외롭고 심란한 마음을 힘겹게 달래곤 잔다.
20대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 10년이었다면, 남은 30대는 아빠를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말수 없고 힘든 티 안 내는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빠가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나니 이제야 조금 힘든 티를 낸다. 외롭다는 감정도 처음으로 마음 밖으로 꺼내놓기 시작했다. 형제들을 여럿 먼저 떠나보내고 나니 명절 같이 큰 날에는 쓸쓸하다는 말도 나긋이 꺼내놓았다. 아빠는 우리 결혼식 날 사촌 언니를 보고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떠올라 울었다고 했다. 맞다. 내가 이렇게나 생각이 많고 여러 감정이 예민하게 드는 것은 사실 아빠를 닮은 거였다.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빠가 무거운 것을 들고 오다 쓰러진 게 꼭 자기 탓 같다고. 먼저 전화드려 여쭤볼 걸, 모시러 갈 걸. 아버님 살아계실 동안 행복하게 해드리자고, 파주에 TV도 놔드리고, 좋아하시는 야구도 언제든 편히 보실 수 있게 인터넷도 설치해드리자고.
남편에게 고맙다.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와르르 무너졌을 거다. 함께 아빠의 안위를 걱정해주시는 시부모님의 존재도 그 자체만으로도 든든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아빠가 아프고 난 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일상을 누렸는지 알게 됐다. 죽고 사는 문제만큼은 도무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의료 기술이 있지 않냐고?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외래 진료 받을 때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정말 하늘이 도와서 사신 거다, 보너스 인생이다, 시술 영상 다시 봐도 아찔하다는 이야길 듣는다. 생사의 문제는 단순히 의술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반면 회사 문제든, 연인 사이 문제든, 부부 싸움이든 힘들어도 노력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다. 혹여 그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한들 심장이 멈추고 폐에 물이 차진 않는다. 하면, 되고, 안 되면, 인정하고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나눌 가족이 있다는 건 값지고도 감사한 일이다. 당연한 명제이지만, 자주 잊게 된다. 친구들이 걱정했다. 내가 결혼식 날 아빠 보자마자 오열할 것 같다고 말이다. 나도 너무나 걱정됐지만, 막상 결혼식 날이 되자 아빠를 봐도 눈물이 안 났다. 그저, 감사할 뿐. 아빠의 손을 잡고 식장을 걸어 들어갈 수 있음에, 아빠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음에 가슴 벅차게 행복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