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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Sep 07. 2023

가을, 여인들 그리고 도서관(2)

에릭 로메르 <가을 이야기>(1998)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화경이라는 것이 있다. 검은 판지에 직사각형의 유리판 세 개를 붙이고 삼각기둥을 만든 다음, 기둥의 아랫면에 얇은 습자지를 발라 봉하고, 색색의 종이를 아무렇게나 잘게 오려 가루를 만들어 기둥 속에 담는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만화경을 들어 이리저리 돌리면 형형색색의 신비스러운 모양들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는데 아직도 그 제작 과정이 눈에 선하다. 황홀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가지고 놀던 만화경을 돌리듯이 가을에 떠올리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국내에서는 ‘여름 이야기’로 알려진 에릭 로메르의 98년 작 <가을 이야기 Conte d'automne>. 10년에 걸쳐 완성된 ‘사계절 이야기’ 시리즈의 완결 편이다.      


첫 장면. 오래전 프랑스의 남부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난 그곳에 또 언제 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운 좋게도 그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여행할 수 있었다.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그곳을 갈 때마다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이 있다. 하얀 건물의 외벽이 만드는 수직선과 태양에 빛나는 뭍 사물들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빚어내는 그 투명한 윤곽들, 그리고 주먹만 한 돌멩이를 깔아 만든 길을 이리 저리로 장난치듯 몰고 가며 오래된 이야기를 가득 머금은 골목들, 작은 광장마다 솟아오르던 작은 분수들. 몇 번이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가 옆 사람에게 필름을 낭비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그 모습을 로메르 할아버지는 첫 장면에 담아내셨다. 내게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은 신나는 일이었다.     


봄, 겨울, 여름 그리고 가을 이야기는 남녀 연애담의 변주곡이다. 영화에서 화려한 볼거리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취향의 관객들에게는 외면당하기 쉬운 영화이나, 80대의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감독의 연애에 대한 감수성과, 소박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몹시 정교하게 고안된 내레이션 장치들의 번득임 등, 에릭 로메르의 발명품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의 것에 비할 만하다.     


나는 에릭 로메르가 지성적인 감독인가 감성적인 감독인가를 가늠해 보려고 한동안 애를 쓴 것 같다. 그러나 <가을 이야기>에서의 로메르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함과 동시에 그 둘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창조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명장이란 반드시 제작비가 엄청난 매머드 스케일의 작품에서만 탄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훌륭한 본보기를 그는 보여 주고 있다. 국내의 어느 비평가는 그를 일컬어 영화가 담고 있는 최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감독이라 했던가.          


소꿉친구 두 사람이 있었다. 마갈리와 이자벨, 이자벨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행복한 중산층으로, 안정된 가정에 장성한 딸의 혼사를 앞둔 우아한 여인이고, 마갈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포도밭을 일구며, 얼마 전 남편을 사별한 여인이다. 추수를 끝낸 넓은 들판에 기대선, 서정주 시인의 시구처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었다. 이자벨 역을 맡은 마리 리비에르는 바로 로메르의 85년작 ‘녹색 광선’에서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젊은 델핀이었기에 이자벨과 델핀이 같은 인물일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마갈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일에 대한 열정으로 메우려 하며, 결국 가장 절실한 문제는 짝을 찾는 것이지만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있어 아무런 해답이 없다는 고백에 이르자, 이자벨은 어느 날 마갈리 몰래 신문에 광고를 낸다.     


‘45세. 미망인. 장성한 자녀 둘. 명랑, 활기차며 사교적이나 시골에서 적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남자를 찾습니다.’ 


마갈리의 말대로 ‘진부하기 그지없으며 천박하기 조차한’ 광고문구를 잘 뜯어보면서 나는 진한 감동을 느낀다. 이만큼 한 사람의 상태를 객관적이며 효과적으로 묘사하기도 드문 일이라는 생가에서다. 이 영화를 요약하건대 결국 이 두 줄짜리 광고문구로 귀결된다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부분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광고문을 만들어본다.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신 많은 분에게 이 방법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그것이 진실로 신문 지상에 실리든 말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꼭 남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신의 객관적 상황묘사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심리치료의 한 방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광고를 보고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자벨은 마갈리를 속이고 광고를 낸 것처럼, 이번엔 남자를 속이고 마갈리 행세를 한다. 제랄드라는 이름의 우수에 찬 매력적인 노신사로 분한 알랭 리보라는 배우는 로메르가 캐스팅한 여타의 배우들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1960년대의 영화 몇 편에 조연급으로 등장한 이후, 2016년 파리시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도 출연했던 중견 배우이기도 하다.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극 중 역할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의 향기에 매료되어 서둘러 인터넷의 이곳저곳을 뒤져 알아낸 그의 배우로서의 경력이다. ‘가을이야기’ 이후로 로메르의 2000년 작 ‘영국여인과 공작’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있고, 비교적 최근인 2019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파비안에 관한 진실>에서도 역할을 맡는 등, 그간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배우다.     

제랄드와의 신분을 감춘 몇 번의 데이트 끝에 이자벨은 그녀가 꾸민 연극의 전모를 고백하고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 우연을 가장하여 제랄드를 마갈리에게 접근하게 하는데.....     


가을 이야기의 한 장면 (출처: www.auvergnerhonealpes-cinema.fr/)

프랑스의 극작가 마리보를 떠올리게 하는, 남녀 간의 얽히고설킨 감정의 세부묘사는, 프랑스의 론강 부근의 지방색을 배경으로, 작은 시골 읍내의 모습과 포도밭의 추수 장면, 왁자지껄한 결혼식 풍경과 더불어 자칫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영화를 아기자기한 행복감과 그 행복감 뒤의 긴 그림자로 가득 채운다. 한눈에 반해 버린 제랄드가 혹시나 가장 친한 벗인 이자벨의 연인일까 두려워 석양을 바라보며 날이 저물도록 스산한 역의 플랫폼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마갈리의 모습은 나이를 초월하여 사랑에 빠진 여자의 내면을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전달하며, 우리는 어느새 사랑이 다가오는 것을 기쁨보다는 두려움으로 맞이했던 지난 시절의 한순간을 회상하게 된다. 하물며 이제는 시행착오를 견뎌내기 어려운 중년의 나이에서 그 두려움과 설렘은 더욱 배가되는 것임을 깨달으며, 사십이라는 물리적인 나이를 차마 가늠도 하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내 스무 살 때의 꿈은 어서 마흔을 넘기는 것이었다. 화학작용처럼 뜨겁고 불안정하여 매일 죽어버릴 것 같은 젊음의 담금질이 어서 빨리 끝나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는 의젓한 나이가 되고 싶었다.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살아 있기만 하다면 사십이나 오십의 나이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긴 화학작용을 오롯이 치러 내지 않고는 사실, 누구도 그 나이에 이를 수 없다.           


마지막 장면. 결혼 피로연의 댄스파티. 쌍을 이루어 흥겨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이자벨의 모습이 보인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이자벨 부부. 카메라는 점점 이자벨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언뜻 그녀의 제로에 가까운 표정이 보인 것 같다. 겨울의 문이 조금씩 열리며 내뿜는 차가운 비밀의 끝자락을 본 것일까. 기쁨도 슬픔도 아닌, 회의나 절망도 아닌, 닥쳐올 ‘그다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지내버릴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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