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 깊디깊어지면, 육중한 겨울 문의 열쇠구멍 안으로 슬며시 제 몸을 맞추는 때도 올 것이다.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도 가을 즈음이고,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몸속의 세포 중 몇 개가, 줄어든 일조량에 반응을 하여 우리를 차분하게 만드는 결과라 하니, 사색의 계절이니 독서의 계절이니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자연의 섭리와 함께 간다.
한동안 나도 천장이 높은 도서관을 죽어라 하며 다니던 때가 있었다. 뭘 위해 그러는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관성의 법칙처럼. 어쩌면 4시 티 타임, 그 도서관 아랫골목 빵집에서 팔던 ‘뺑오쇼콜라 (초콜릿 페스츄리)’를 먹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를 위시하여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 건너편,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과, 프랑스 대학의 시조인 소르본 대학 도서관은 내게 추억의 장소다. 그 오랜 역사의 장소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를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귀신의 속삭임을 등에 업고 열심히 책장을 넘기곤 했었다. 그들의 혼과 그들의 기억이 거기에 있었다.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내부. 출처: Marie-Lan Nguyen, CC BY 2.0 FR via Wikimedia Commons
알랭 레네 감독의 1956년작 ‘세상의 모든 기억 (Toute la mémoire du monde)은 파리의 비비엔가에 위치했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 리슐리외관*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도서관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이유는, 그것이 레네의 작품이기 때문만 아니라, 나 자신이 수년간 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접어두고라도, 이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마술적인 도서관의 이미지에 이미 매료되어 있었던 터라, 또 하나의 유사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이미 몇 편의 레네 작품을 인내(?) 해 온 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어필하는 그의 방식에 지겨움을 느끼며 그의 영화가 난해하다는 사람들에게 그건 난해가 아니고 그냥 재미없고 지겨운 영화일 뿐이라고 홀대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몹시 모순되게도 그의 선구자적 예술가기질과 ‘끝까지 가는’ 번득이는 실험정신 하나만은 높이 평가하여 프랑스 영화사에 없어서는 안 될 전무후무한 인물로 꼽기도 한다. 지겹다는 말과 형편없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닐 수도 있다.
나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그것은 본래 프랑스 정부에서 요청한 홍보용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으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홍보용 영화에 대한 선입견-그건 아마도 일차적 정보 전달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유사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과거의 ‘대한 늬우스’의 망령에서 아직 풀려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 얼마나 저차원적인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지극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독립된 창작품이었다. 실제로, 영화제작을 요청했던 측에서 자신들이 기대했던 선전용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2001년 6월 1일 모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던 알랭 레네 영화제의 마지막 날, 나의 일상은 여전히 꽉 짜인 시간표 속의 네모 칸 안에 묶여 있었으며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협궤열차였다.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한 아슬아슬한 영화 보기는 이제나 저제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작은 빈칸이었다.
<세상의 모든 기억>의 한 장면 (출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누리집)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기억과의 투쟁’이란 문장으로 요약되는 도서관 안에서의 책들의 일생은 이미 내가 감지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이 알고 있었으나 어떤 이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인간의 기억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도서관’은 수많은 기억을 지하창고에 날 것 그대로, 혹은 혼돈의 상태로 축적하다가 어느 날, 그 기억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시작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의 형태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서고 안에서 무차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장서가 ‘마치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어느 날 문득 한 열람자의 기호에 따라 우연히 선택되어 그 존재가 가치와 의미를 띠게 되는 과정’을 낱낱이 쫓는 것이다.
1950년대의,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디지털시대 이전의 아날로그적 시대 배경은 도서관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서와 분류와 열람 과정을 슬로 모션으로 보여 주고 있었으며 개미굴이나 벌집 같은 내부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기억의 입력과 재생과정은 알기-기억하기- 잊히기-다시 기억하기라는 파생적 순환 구조 안에서, 보르헤스의 희망, ‘언젠가는 이 거대한 도서관의 내부를 전지전능하게 알고 있는 사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숨바꼭질이 과연 끝나기는 할 것인가 하는 절체절명의 인간조건과의 지난한 투쟁.
'... 어느 책장에는 (사람들이 추론하기를)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책이 존재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한 사서가 그것을 대략 훑어보았고 그는 신과 유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언어에는 아직도 아득한 옛날의 그 사서에 대한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 한 세기에 걸쳐 가능한 모든 곳을 뒤졌으나 허사였다. 어떻게 그가 거처했던 그 고귀한 비밀의 육각형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역행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한다.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C라는 책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러한 모험들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했다. 나는 우주의 어떤 책장에 그러한 총체적인 책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미지의 신들에게 한 사람 - 단 한 사람, 설사 그게 몇천 년 전일지라도 - 이라도 좋으니 그 책을 들춰보고 그것을 읽어 본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비록 나의 자리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천국이 존재하게 하소서. 내가 능멸당하고 죽어 무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단 한순간,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당신'의 거대한 '도서관'이 정당한 것이 되도록 해 주소서......'
우연히 발견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이 구절은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어렴풋이 알게 해 주었으며, 이 역사적인 ‘지리상의 발견’ 이후 그의 구절은 내 일기장 깊숙한 곳에 보물처럼 간직되어 있다.
나는 오늘도 침대에 길게 누워 육체 이탈을 꿈꾼다.
나는 내 방의 천장 께에서 그 아래 누워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한 손으로 하품이 나오는 입을 막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조금씩 위를 향해 오른다. 나의 아파트가 보이고 나의 마을이 보인다. 곧이어 삼면으로 바다가 출렁이는 한반도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금세 동그란 지구가 보인다. 스텐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첫 장면처럼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맞추어 인공위성이 주변을 돈다. 나는 영화를 좀 너무 보는 것 같다. 다시 태양계 은하계 순으로, 나의 상상력은 결국 내 얄팍한 지식과 빈곤한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함을 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별 사이를 유영하게 되는 순간, 나는 전지전능한 사서의 번득이는 지혜의 눈빛을 잠깐 곁눈질한 것 같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파리시에 리슐리외관, 오페라 가르니에관, 프랑수아 미테랑관, 아르스날관 등 4 개관, 남프랑스 아비뇽시에 장 빌라르 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