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의 전제는 실력이다
예전에 ’오후 6시에 시작되는 하루’라는 문구를 접했다. 자신의 일에 철저한 프로가 되려 하기보단 그저 근무 시간만 어떻게든 채우고 그 이후의 여가 시간만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런 워딩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들은 퇴근 후 다양한 문화 생활 및 휴가를 이용한 여행 등을 소위 ’워라밸‘로 간주한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은 그런 식으로 달성할 수 없다. 삶 속에서 일이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생계 수단 뿐만 아니라 전문성으로부터 나오는 자아실현의 장으로서 일이 자리잡을 때만이 비로소 여가와의 건전한 공존이 가능한 것이다.
10년간 자영업에 종사하면서 별 걱정없이 생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차별화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딱히 했던 것은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지만 하염없이 매장 마감 시간만 기다렸던 날들도 많았다.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현실에 안주했었다. 걱정에 위축되어 정지해 있기도 앞뒤 가리지 않고 도전하기도 애매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차에 유튜브채널 ‘EO 이오‘에서 유호현 저자의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고 책도 만났다.
저자는 위계(Rank-driven) 조직과 역할(Role-driven) 조직의 비교를 축으로 다방면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상급자에게 결정권 및 정보가 집중되고 계획된 업무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것이 조직 구성원의 지상 과업인 위계 조직은 산업화에 따른 고성장 시대에 적합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으며 개념 설계의 역량이 있어야만 기업의 성장이 가능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상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형의 조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역할 조직이다.
역할 조직에서 모든 구성원은 각자의 전문성을 갖춘 프로페셔널로 대우받으며 업무에서의 폭넓은 재량을 보장받는다. 또한 저자의 경험에서도 나오듯이 역할 조직의 인재들은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심지어 즐거움과 행복마저 느낀다. 개인적으로 그저 생존을 위해서였을 뿐 직업적인 성취감과 만족을 딱히 느껴보지 못한 터라 이 대목에 가장 눈길이 갔다. 조심스럽지만 전문가가 주축이 되는 미래 사회에선 성장 없는 생존은 어려워질 것이라고 감히 예측해 본다(물론 관료적인 구조의 재벌 대기업의 영향력이 막강한 대한민국에서는 쉽게 올 수 없는 미래일지도 모른다).
스포츠 구단의 스토리는 기업 경영에서 케이스 스터디의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개인적으로 여러 종목의 수많은 구단의 경기를 중계 및 직관을 통해 즐기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것을 넘어 하나의 팀(조직 또는 공동체)이 어떤 chemistry 및 mechanism에 의해 움직이는지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그런 시선에서 보니 선수들은 최고의 능력을 갖춘 실무자이고, 감독은 리더십에 특화된 관리자이며, 구단은 그들 각자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도록 지원하는 역할 조직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독의 경영 방침이 자신의 이익과 대척점에 설 경우 선수 입장에서 이의도 제기할 수 있으며 현재의 팀과 이해관계가 틀어질 경우 이적 시장으로 나가 협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오프 시즌에 수많은 선수들의 이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가치관이 일찍 자리잡은 탓이 아닌가 싶다. 이에 반해 한국은 기업 전반에 아직까지 위계 조직의 성격이 많이 남아있고 이러한 탓에 일부 스타 플레이어를 제외하고는 선수의 권익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감독과 선수 사이를 ’사제 관계‘라는 워딩으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 관계의 경직성이 느껴진다).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탐색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역할 조직의 존재만으로 더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심미적 가치가 우대받고, 차별화된 다양성이 각광받는 시대에, 역할 조직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적어도 변화의 흐름에 무난히 적응하고 개인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든든한 베이스 캠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여년 전 가수 임재범은 영화 ‘동감’의 OST ‘너를위해‘에서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라며 아직 확실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연인과의 관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표현한다. 지금 나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진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등이 겹치며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앞으로의 삶은 과거에 비해 질적으로 성장한 모습이기를 소망한다. 이런 개인적 소회를 담아 다음과 같은 ‘개사 버전‘의 형태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을 허공에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