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인문학 독서 후기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관전에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 3시간이 넘는 경기 시간 중 실제로 공이 움직이고 타격이 진행되며 주자가 뛰는 시간은 고작 18분 남짓이다. 농구나 배구처럼 스피디한 종목이 화려한 음악을 동반한 뮤지컬이라면 야구는 배우의 대사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연극에 가깝다. 관중은 물론이고 신나게 흥을 돋구는 치어리더들도 한 경기를 ‘풀직관’하기란 쉽지 않다. 4대 프로스포츠를 다 응원해 본 베테랑 치어리더가 “어쨌든 2시간 안에 다 끝난다”는 이유로 농구가 그나마 할만하다고 했는데, 타자당 투구수 1-2개로 퍼펙트 게임이 되지 않는 한 야구에선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투수 교체에서부터 대타 기용 및 수비 시프트 등등을 인지하며 따라가기엔 3~4시간은 너무도 길다. 투수의 구질이나 타자의 스윙 매커니즘 따위는 애초부터 관중석에서 파악할 수 없다(물론 많은 팬들이 스마트폰 중계를 같이 보며 해설을 듣긴 하지만). 응원가를 따라부르고 치킨과 피자, 맥주와 콜라에 영혼과 육신을 맡겨야만 한 경기의 대장정을 완주할 수 있다.
게다가 한 시즌에 총 720경기(플레이오프 제외)가 치러지고 이런 시즌이 40년 이상 누적되며 쌓인 거대하고 웅장한 ‘빅 데이터’의 압박은 야구라는 종목에 다가가고 ‘입덕’하기를 주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한국야구(KBO)의 경우이며 30개 구단이 시즌 162경기를 치르는 미국야구(MLB)에 멋모르고 접근했다가는 정신적으로 ‘압사’(?)할 수도 있다. 더구나 타율, 홈런, 탈삼진, 평균자책점(a.k.a 방어율) 등의 고전적 기록 지표만 언급했다간 ‘옛날 사람’되는 건 순식간이다. OPS, WHIP, WAR, BABIP 등의 2차 ‘첨단’ 스탯(세이버 매트릭스)까지 챙겨줘야 야구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다. 과장 조금 보태 요즘 야구팬 행세 좀 하려면 어지간한 학교 시험 준비 이상으로 공부해야 할 지경이다.
OPS : On-base Plus Slugging. 야구에서 타자들을 평가하는 기록 중 하나로 '출루율 + 장타율'로 계산한다. 타율만으로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타자들의 득점 생산력을 계산하기 위해 도입된 지표.
WHIP : Walks plus Hits divided by Innings Pitched.이닝당 안타+볼넷 허용률.투수들을 평가하는 기록. 평균자책점(방어율)이 9이닝 동안 던졌을 때 투수의 예상자책점의 숫자라면 WHIP는 1이닝 동안 던졌을 때 홈에서 떠나보낸 타자의 예상 숫자라 할 수 있다.
WAR : Wins Above Replacement(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의 약어. 선수가 팀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표현하는 종합적인 성격의 기록이다.
BABIP : 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 인플레이로 이어진 타구에 대한 타율을 계산하는 용어이며타자와 투수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다행히 야구는 데이터 그 이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팬들을 위하여 남겨준다. 그리고 바로 그 ‘빅 데이터’로부터 비롯된 압도적으로 많은 이야기야말로 팬의 입장에서 느끼고 배우고 누릴 수 있는 야구의 정수이다. 그 이야기들의 무대와 주제는 그라운드와 덕아웃을 넘어 평범한 우리내 삶의 영역으로 향한다. 우승 문턱에서 분루를 삼키며 물러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연패를 겪으면서도 마운드에 서고, 장타를 맞을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직구를 던지며 격렬한 충돌을 불사하고 베이스로 쇄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바쁘고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와 닮았다. 불의의 사고와 질병으로 일찍 떠나간 선수들을 기억하는 모습에서, 패배의 아픔을 뒤로 하고 도열하여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습에서, 뜻하지 않게 베이스에서 충돌한 후 형과 동생 및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본다. 패배 앞에서도 선수들을 감싸고 자신을 탓해달라는 감독에게서 리더의 듬직함을 느끼고 나이를 잊은 활약을 펼치며 오랫동안 살아남는 노장에게서 자기 관리의 ’교과서‘를 본다. 경기 후반 심지어 9회에 반격을 시작하여 결국 승부를 뒤집고 주전이 다 빠져나갔음에도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모습에서 끝까지 가봐야 세상사의 본모습이 드러남을 깨닫는다. 야구가 곧 인생이라는 말이 의례적인 클리셰나 레토릭이 아닌 이유이다.
최근 거액의 부를 축적한 유튜브 인플루언서는 조기 축구 동호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자신의 친구를 사례로 들면서 부자 되기와 관계없는 활동을 멀리 할 것을 독자에게 권했다. 일견 맞는 말임을 수긍했고 저자가 왜 그런 조언을 건냈는지도 대략 파악했다. 배경의 차이를 극복하고 만족할만한 부를 쌓기 전까지는 취미 생활 따위는 접어두고 독하다 싶을 정도로 돈이 되는 일에만 매진하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 지인을 안쓰럽게 여기다 못해 거의 조롱하는 투로 흐르는 저자의 어조는 못내 불편했고 독자를 가르치는 듯하는 일종의 오만함마저 느껴져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물론 나 역시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부자를 갈망함을 숨기지도 않는다. 다만 그 부자라는 사람은 평생 모를 것 같다. 스포츠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과 연대하고 소중한 이들을 돌보고 기억할 수 있으며, 돈 이외의 소중한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고, 세상이 크고 넓으며 인생의 옳고 그름을 한 마디로 논할 수 없음을 배운다는 것을. 2016년 시카고 시민들은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앞에 기뻐함과 동시에 먼저 떠나간 소중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했으며, 2022년 고척돔의 팬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언더독’ 키움 히어로즈의 투혼에 감동하고 눈물 흘렸다. 2009년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7차전이 끝나자 12년만에 우승한 40세의 노장 이종범과 커리어 첫 우승을 경험한 25세의 영건 이용규는 서로를 얼싸안고 오열했다. 야구 전문가들조차 그 장면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했다.
https://youtube.com/watch?v=drcKGyepW6k&feature=share
이용균 기자는 오랜 세월 야구를 취재하며 많은 경기를 봐 왔고 야구와 일상을 연결한 소감을 일기처럼 연재했는데, 그 글들이 어느덧 쌓여 책이 되었다. ‘인문학’은 얼핏 듣기엔 그저 낭만적이고 고고한 명언을 인용하는 지적 유희로 다가온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당당히 마주하며 헤쳐나가기 위한 소소한 지혜를 건내주는 게 진짜 인문학의 위엄이고 정수이다. 야구는 세상을 한바탕 뒤집을 수도 없고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지도 않는다. 다만 더 따뜻하고 사람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윤활유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진정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이란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고 이별 앞에서 슬퍼하고 패배 앞에서 안타까워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야구는 앞으로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손톱만큼은’ 꾸준히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