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여덟째 날
춥다. 서서히 올라오는 한기에 깨어났다. 얼얼해서 둔해진 한쪽 피부 때문에 자세를 바꿨다. 다시 잠이 들기 시작하면 기다리던 한기가 다시 나를 깨웠다. 이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에 일어났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시간을 봤다. 새벽 2시 6분.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을지, 아니면 지금부터 걸을 것인지. 선택을 결정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의 잠은 끝났다. 지금부터 걷는다.
잠을 포기하니 자다 일어나서 간다는 것보다 잠시 쉬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트럭에서 서서 세상을 봤다. 고요했다. 그리고 진한 안개로 가로등에 뿜어지는 불빛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치 안개로 점령된 마을 사일런트 힐 같았다. 크리쳐들이 나올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 운전하는 건 미친 짓이라 도로에 차가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위험할 때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전화밖에 없어졌다. 안전 또 안전을 머리에 새기며 짐을 정리했다.
태초는 어둠에서 시작했을 거다. 그다음 빛이 탄생했을 거고. 이를 신이 만들었든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었든 아마 이유가 있겠지. 인간들은 이 빛을 모방해 수많은 빛을 만들어 냈다. 확실히 여기에도 수많은 이유가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 그중에 하나, 가로등에 의지해 내가 걸어가고 있다. 아무도 없을 거리에 가로등이 빛을 내고 있다. 어제의 가로등이 무슨 이유로 빛을 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나를 위해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기괴한 잡음들이 마을 곳곳에 들려왔다. 사람의 흔적들이 보이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외로웠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반갑지 않을 거다.
어딘가에서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수많은 발걸음 소리였지만 나뭇가지로 땅을 탁 치듯 작은 소리였다. 오른쪽 안개 낀 시야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작은 개 5마리였다. 소설 속 버려진 마을에 사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개들의 종은 재각기였다. 하지만 저들은 가족처럼 보였다. 한 줄로 걸어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거 같았다.
“멍멍아~”
반가운 마음에 박수 소리를 내며 불렀다. 그러자 개들은 나를 보더니 방향을 틀어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개들에게 줄 음식이 있나 머릿속에서 배낭을 뒤지고 있었다.
개들을 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뭐지? 뭘까?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꿈같은 상황이 일어날 거 같았다. 뿌연 안개가 꽃잎이 되고 붉은 가로등은 단풍나무가 되어 개들과 뛰어노는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개들이 짖었다. 반가워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경계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개들은 자기들이 침을 흘리는 줄도 모르는지 침도 삼키지 않고 짖어 댔다. 위협 그 자체였다. 죽기 전에 자기의 울음을 잘 새겨들으라는 듯 열정적였다. 난 그저 반가운 마음에 불렀는데. 먹을 걸 나눠주고 싶었는데. 공포보다 서운함이 앞섰다. 나는 개들이 만든 원형의 틀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이어갔다.
하지만 개들은 나를 쫓아왔다. 뒤에서. 옆에서. 가끔은 앞으로 달려와 나를 노려보며 미친 듯이 짖어 댔다. 금방이라도 내 발을 물어버릴 거 같았다. 개들의 어금니가 가로등 불빛에 발했다. 어쩌면 오늘의 가로등 불빛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야식을 찾은 저 개들을 위한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이제 이 곳은 속세보다 극락에 가까워 보였다. 물살 좋은 강이 보인다면 이 길은 황천길일지도 모른다.
그때 뒤에서 또 다른 소리가 다가왔다. 개들의 소리를 잠재울 정도의 큰 소리였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 중 하나였다. 자동차였다. 검은색 세단이었다. 현대인들에게 맞춘 저승사자인 줄 알았다. 강한 불빛과 함께 우리의 씬에 들어왔다. 안개등을 켜고 나를 지나쳐 갔다. 천천히. 그리고 이내 곧 사라졌다. 조용히.
이 거리에 고요함만이 남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개들이 보이지 않았다. 현대적인 저승사자는 내가 아닌 저 개들을 데리고 간 거 같았다. 다시 혼자가 됐다. 아니다. 무언가 내 곁에 있었다. 공포라는 초대하지 않은 동행자가. 공포는 내 심장을 한 움큼 쥐더니 머릿속에 속삭였다.
‘두려워 말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