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모범생'이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법
어렸을 때부터 늘 '내'가 최우선인 삶을 살아왔다. 10대까지의 내 인생에서 최고의 성과이자 효도는 시험을 잘 보고 인정받는 것이었고 다행히도(?) 난 공부를 곧잘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의무와 존재도 감히 '공부'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20대가 되어 종목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의 커리어와 성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였다. 우리 애기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양이 집사가 된 지 어언 4년차.
여전히 내 인생에서 '성취'는 나의 삶을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척도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중 하나'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바꿔줘서 이 아이들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처음 아이들을 데려온 건 2020년 9월 1일. 지금은 너무나 사람을 잘 따르는 순둥이들이지만, 이 손바닥만한 아이들은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한 번은 B 가 가출한 적도 있었다. 일요일 6시경, 여느 주말 저녁과 같이 가족들과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는데, 환기를 위해 현관문을 잠시 열어두고 한 눈 판 사이, B가 총총총 나가버린 것이다. 날이 꽤 쌀쌀했음에도 미친x처럼 반팔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에, 목이 쉬도록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을 찾아 아파트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두 층 위에 우리집과 같은 위치의 문 앞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나의 품에 이 말캉거리는 생명체는 안전히 돌아왔다.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느꼈던 절망감, 왜 더 잘 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그 느낌은 앞으로 다시는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는, 평생 처음 느껴보는 그런 감정이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태어나서 내가 이토록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준 생명체가 있을까.
그런 아이들과 정말 내가 헤어질 수 있을까?
벌써부터 헤어짐의 순간이 두렵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음이 먹먹해져서 한쪽이 말 그대로 욱신거린다. 사랑을 준 만큼, 이 아이들과 떨어지는 건 너무나 힘들 것이고 애초에 왜 키우자고 했을까, 종종 후회의 감정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털뭉텅이 순둥이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책상 위에서 엉덩이를 내밀며 내 곁에 있는
이 따뜻한 아이들이, 시크한척 하지만 도도한 이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세계를 뒤로 하고
얼마든지, 나에게 빠져들 수 있는 눈빛을 안겨주기에.
난 오늘도 우리 냥이들을 위한 행복하고 멍청한 이타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