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꺼내지 않았던 어느 '리터니'의 이야기 (1)
이 글을 교문 앞에서 자꾸만 발걸음이 멈췄던 그때의 당신에게,
그리고 지금도 교실 어딘가에서 하루를 견디고 있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그 시절 제 세상은 교실이 전부였지만, 그 바깥의 세상은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고, 다정하고, 살아볼 만한 곳이더라고요. 이제는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지금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아프게 견뎌내고 있을 이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는 한번도 오디션을 본 적이 없는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배역은 “미국에서 온 전학생.” 무대는 한국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초등학교 고학년때쯤부터 학교는 더 이상 단순히 학교가 아니었다. 서열과 권력, 다툼과 증오, 공모와 계략, 동경과 질투. 교실에는 이미 사회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엑스트라 중 한명이었다.
2005년, 아빠의 유학이 끝나고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나는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1년 반 만의 귀국. 그 짧은 공백으로 나는 “미국에서 온 애”라는 정체성으로 규정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나에게 영어 발음을 듣고 싶다고 했고, 내가 몇마디 하면 다들 “와아”하며 쳐다보곤 했다.
나는 한국에서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혼의 단짝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 몇명을 사귀었다. 겉보기엔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 영어 발음을 듣고 쏟아낸 반응도, 단순한 호기심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무대를 뒤엎을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운명을 바꿔놓았던 건 단지 편지 한 통이었다. 복도에서 걸어가고 있던 나를 기습하듯 아이들은 우루루 달려왔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는 우리 집 앞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했다.
펼쳐보니, ‘내가’ 당시 반에서 친했던 친구 한명 한명을 콕 집어가며 공들여 비방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거 너가 쓴거야?”라고 따져 묻는 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미국 FBI 요원만큼 진지했다.
그들은 편지의 필체를 실제 내 글씨체와 대조해보거나 애초에 내가 왜 그런 편지를 썼을지를 질문할 정도로 치밀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내가 범인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었다.
교실이라는 생태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치밀하게 얽혀있는 곳인지, 그때 나는 잘 몰랐다. 당연하게도 그런 기습 수사에 무죄를 차분하게 입증할 민첩함과 침착함 따위는 없었다. 나는 마치 익숙한 바닷속을 천진하게 헤엄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포악스러운 상어를 만난 개복치와 같았다.
그 편지의 단 한 글자도 직접 가담한 적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서 눈물이 나왔다. 누군가가 이토록 치밀하게 나를 무너뜨리고자 계획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어설픈 초딩 요원들에게 나의 눈물은 유죄를 확신하게 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가 내 책상에 욕을 써놓거나, 급식판을 엎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실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교실은 늘 시끄러웠다. 식판 바닥이 긁히는 소리, 아이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소리,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내 식판 앞만 조용한 것 같았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자꾸 주위를 의식했다. 누가 보고 있진 않을까, 내가 혼자 먹는 걸 누군가가 알아차리진 않을까. 나는 투명해지고 싶었지만, 투명해질 수 없는 존재였다.
1년 뒤, 나는 같은 동네 중학교에 진학했다. “편지 사건”을 알던 아이들 중 절반은 그 학교에 진학했고, 절반은 다른 중학교에 흩어졌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새 학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봐,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에 대해 쑥덕거릴까봐 자꾸만 초조해했다.
다행히 나는 다른 세계관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찾았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는 인터넷 상의 익명의 존재들이었다.
밤이 되어 엄마아빠가 잠에 들면 마치 도둑이 된것만 같은 심정으로 슬금슬금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불이 꺼진 캄캄한 거실의 컴퓨터를 켰다. 잠귀가 밝은 아빠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당시 인터넷에서는 온갖 커뮤니티가 막 태동하고 있었고, 나는 커뮤니티의 “새벽반” 친구들을 만났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나와 같은 청소년들이 밤새도록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했다. 나는 새벽까지 활동을 한 뒤 날이 밝아올 때쯤 잠이 들곤 했다.
아침의 나의 몰골은 마치 밤새 현장을 지킨 형사처럼 늘상 초췌했다. 수업이 시작한 시점부터 끝나기만을 고대했고, 쉬는 시간은 나의 수면을 위한 Q 사인이었다. 나는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곧장 팔을 뻗고, 가장 아늑한 자세로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엎드려 쿨쿨 잠을 청했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마치 누군가 시켜서 하는 아주 고된 노동과 같았다. 흥미가 없는 수업 시간에 억지로 앉아있는 일상, 쉬는 시간이 되면 웅크려 자는 일상. 그리고 이런 일상의 결과로 지지부진한 성과를 드러내는 투명하고 정직한 나의 성적표.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속에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시선들이 아직 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새 친구들과도 끝내 완전히 편해지진 못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중3이 될 무렵, 놀랍게도 나는 학교에 부적응하는 상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딱히 재미는 없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넋을 잃고 보게된 텔레비전 채널처럼 학교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익숙해져갔다. 이미 일상을 침투한 불행에 어디서부터 힘들다고 호소해야할지 잘 몰라서 매일 학교에 성실하게 출석하는 불성실한 학생으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주말. 내 안에 쌓여있던 것들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날 학교갈 생각을 하는데 교실에 앉아 있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때 날 바라보는 다정한 엄마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엄마, 사실은 나 학교 가기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어.”
내 안에 오래도록 갇혀 있던 한마디가 드디어 터져나온 순간이었다.
나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펑펑 울어대며 엄마에게 모두 쏟아내었다. 학교생활도,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도, 공부도, 다 어렵고 지겹고 힘들다고. 단 한번도 제대로 적응했던 적 없다고. 쉬는 시간엔 매일 엎드려 있는다고.
엄마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다른 것보다도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성적인 엄마는 잠시 곰곰 생각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가기 싫으면… 일단 가지 말자.”
나는 엄마의 말에 오히려 긴장했다. 혹시 화나서 반어법으로 말하는 건 아닐까? 나는 신중히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엄마는 담담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는게 맞지.”
엄마는 그 단순한 처방으로 극적으로 나를 학교에서 구원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