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꺼내지 않았던 어느 '리터니'의 이야기 (2)
나는 처음으로 시간표 없는 하루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침이 되자 엄마는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했고, 나는 엄마의 옆좌석에 탔다. 엄마는 당시 엄마가 일하던 학교 근처 도서관에 나를 태워다 주었다.
아담한 갈색 벽돌 건물을 마주한 내 가방엔 핑크색 넷북, 지폐 몇장, 공책 하나, 그리고 필기구가 있었다. 나는 아무도 출석을 확인하지 않는 도서관에 가서 나만의 방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1교시는 “영어”였다.
나는 틀을 마구 벗어나는 선생님이었다. 학교 교과서 지문보다는 영어로 된 소설을 주로 읽혔다. 도서관의 쿰쿰한 책 냄새를 맡으며 분량은 정해두지 않고 읽고 싶은 만큼 찬찬히 공들여 읽혔다.
아주 오랜만에, 해내야하는 숙제 때문이 아닌 오직 읽고 싶어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미국에서 살던 시절, 책을 읽던 감각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밤에 자라고 해도 두툼한 이불 속에 들어가 웅크린 채 몰래 책을 읽을 정도로 책을 사랑하던 시절이었다.
때때론 기사도 읽었다. 아빠가 어느날 건네준 뉴욕타임즈지는 마치 어른들의 세계의 집약체 같았다. 생소한 영어 단어들이 가득했지만, 무언가 상당히 지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어른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거기 써있는 기사들을 한 문장에 7개씩 단어사전을 뒤져가며 힘겹게 읽어내고 나면, 세계가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는 너무 넓고, 이 넓은 세계에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별의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한국 학교에서 겪어낸 것들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이상하게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펼쳐낸 뉴욕타임즈지의 Opinion 섹션에서 Nicholas Kristof라는 칼럼니스트가 작성한 칼럼을 읽었다. 베트남의 성 인신매매로 인해 너무나도 어린 10대 소녀들이 사실상 성노예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세상에 이런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왜 아무도 이 일들에 열을 올리지 않는가. 왜 어른들은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듯이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처음에는 그저 분노했다. 너무 부당하고 끔찍해서, 집가는 차안에서도, 다음날 도서관에서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런데 그저 화만 내기에는 내 마음 속이 너무 답답해서, 어느 순간 그 분노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순간이 어쩌면 무기력하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2교시는 “작문”이었다.
나는 원래 글을 쓰던 아이였다. 글을 쓰는 건 책을 좋아했던 나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잘 쓴 책들을 마구 읽어대고나면 허기가 진것처럼 나도 글이 쓰고 싶어지곤 했다. 아빠 노트북을 빌려 몇시간동안 무엇이든 써내리고 나면 엄마가 장난스레 “우리 작가 선생”하며 코를 찡긋대며 웃곤 했다.
하지만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는 내 안의 언어를 흡수하고 내보내는 문이 쾅하고 닫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도 들지 않았었고, 머릿속에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도서관에서 넷북을 키면 멈춰 있던 문장들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건 아니었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 행위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는 게 기뻤다. 문장을 쓰다보면 오랫동안 흔들리고 있던 무게중심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1, 2교시를 보내고 나면 보통 배가 고파졌다. 그러면 나는 도서관 지하에 있는 구내 식당으로 내려갔다. 떡라면, 참치김밥, 제육덮밥, 순두부찌개. 그날 먹을 메뉴를 고르는 영양사가 다름아닌 나라는 사실은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2900원짜리 떡라면이었다. 꼬들거리는 라면 위에 휘휘 저어 넣은 나풀거리는 계란이 포근하게 감쌌고, 얼큰한 라면 국물과 함께 먹는 쫄깃한 떡국떡은 나에게 더할나위없는 다정한 식사였다. 또래 무리의 틈에 끼어, 식판의 쇠 긁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게 숟가락을 움직여 먹었던 급식과 달리 도서관에서 여유있게 홀로 휘젓는 라면 한 그릇은 나를 온전히 먹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3교시 “진짜 공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도서관 학습실에서 넷북으로 인강을 들었다. 대부분의 날은 목표한 진도보다 훨씬 적게 진도를 나갔고, 자주 인강을 멈추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 공부의 시간이었다. 숙제도, 시험도 없고, 내가 집중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선생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이 세운 진도표에 따라 다음 강의를 틀고, 또 다음 영상을 켰다. 그게 나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성취였다.
문득 공부를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손을 들고 발표를 하던 모습이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자신감이 넘쳤었다.
미국에서의 모습도 생각났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영어를 잘 못하던 나는 ESL 기초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상냥하고 똑똑한 대학생 튜터 선생님을 만났다. 튜터 선생님은 나에게 소설과 글쓰기를 중심으로 영어를 가르쳐주었고, 그 전에도 한국어로 책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 튜터 선생님 덕분에 빠르게 영어로 소설 읽는 것에 빠져들었다. 불과 6개월 뒤, 나는 ESL의 여러 단계들을 건너뛰고 가장 높은 고급 반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학습이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생활하며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시들어가기 전의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엎드려 무수히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시간들, 그리고 학기가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바랐던 시간들. 그 모습들이 나는 너무 익숙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생기 있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던 나도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은지 60일이 되던 날, 엄마와 나는 학교에 돌아가는 것을 놓고 고민을 했다. 무단결석일 수가 전체 학사일 수의 1/3인 63일이 되는 시점부터 학교에서 제적이 된다고 했다.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린아, 어떻게 하고 싶어?”
학교라는 공간이 바뀌지는 않을 터였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 공간에서 이어지는 지난한 수업, 시간이 되면 받아 먹는 급식, 수업 종의 사인에 맞춰 움직이는 아이들. 학교는 그저 학교였다. 그러나 그 똑같은 공간에서 새로운 장면을 열 용기가 있는지, 그게 엄마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떠올렸다. 도서관에서 가만히 앉아 책에 몰두하던 순간들, 오랜 기간 묵혀왔던 마음의 글들을 쏟아내며 위안을 얻던 순간들.
잊고 있었으나 끝끝내 되찾게 된 그 감각들을 떠올린 순간, 나는 문득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학교에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교실에 앉아있는 나 자신을 떠올렸고, 더 이상 숨이 턱 하고 막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학교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다시 학교로 돌아갈게.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
도서관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나를 기어코 구원해낸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손때가 묻어 색이 바랜 파삭거리는 책들, 낡은 나무 책상들, 그리고 책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하고 묵직한 정적.
나는 1층으로 내려갔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제법 따뜻하게 얼굴을 비췄고, 화단에 있는 작은 나무들이 선명한 초록빛을 띄고 있었다. 2009년 6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에 딱 좋은 계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1화를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여기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