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개인적인 스웨덴 스톡홀름 여행기 (1)
나는 어쩌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스웨덴을 여행하게 되었는가.
그 여정은 바로 이 대사에서 시작되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비둘기와 바게트가 가득한 파리에서 1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안 됐던 때였다. 프랑스의 철학적이고 심오한 영화들을 보면서 한때 파리에 대한 로망을 품었으나, 길에서 겪었던 일상적인 “니하오”와 눈찣기. 그리고 직설적이고 콧대 높은 파리 사람들을 겪은 뒤 파리는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가득했다.
나는 경영대 수업에서 만난 스웨덴 교환학생 마커스와 학교 근처의 빈백이 있는 카페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그가 충격 받은 나의 표정을 확인한 뒤 더 설명하려는듯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성을 금기시하는지 모르겠어. 스웨덴에서는 성이 그냥 자연스러운 거야. 스포츠처럼 그냥 하는거라고.”
섹스와 스포츠? 나는 단언컨대 한번도 이 두개를 조합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마커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걸 금기시하는게 난 어색한 것 같아. 인간이라면 다 하는건데 왜 그걸 금기시해야돼?”
마커스는 계속해서 스웨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육아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며? 스웨덴에서는 남녀가 평등하게 육아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거야. 육아만 하는 아빠들을 일컫는 ‘라떼 파파’라는 단어도 있어.”
당시 남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몰두해있었던 나는 마커스의 말을 들으며 스웨덴이 더 궁금해졌다.
마커스는 200cm를 육박하는 커다란 키에, 토이스토리의 버즈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얼굴이지 싶을 만큼 뽀송하고 정직하게 생긴 친구였다. 차디찬 나라 스웨덴에서 온 마커스였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그의 놀라운 따뜻함이었다. 그와 대화를 이어갈 때면, 그는 커다란 눈에 온전히 나를 집중하여 담았다. 나는 남자와 이토록 재미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마커스를 만난 뒤 나는 종종 생각했다. 스웨덴이라는 나라엔 도대체 마커스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더 있을까?
나는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벌써 직장인 3년차가 되었다. 나태한 나의 일상 한가운데서, 어느 날 스웨덴에 사는 경영 컨설턴트에 대한 드라마 “러브 앤 아나키”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우연히 다시 스웨덴을 만났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자꾸만 마커스가 떠올랐다. 특히 그가 했던 그 대사가 자꾸만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스웨덴에서 섹스는 스포츠 같은 거야…”
그의 대사가 기억난 이유는 아마도 주인공들이 자꾸만 옷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주인공들이 옷을 벗는 장소가 침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공 장소에서 옷을 벗었다. 수영장에서, 가족 모임에서 자꾸만 나체로 등장했다. 반항끼 가득한 남녀 주인공들에게 나체로 나타나는 것은 마치 그들만의 장난 또는 저항 같은 것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단지 내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스웨덴의 그 장면들은 내가 아는 가장 자유분방한 나라, 미국과도 또 달랐다. 미국인들은 성조기가 그려진 팬티를 입고 길에서 댄스 퍼포먼스를 할 정도의 자유분방함은 있지만, 이렇게 아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히 이건 어나더 레벨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스웨덴은 왜 벗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나요?”
나는 검색했고, 아니나다를까 미국의 네이버 지식인 격인 Reddit에서 이미 수많은 미국인들이 나보다 더 진지하게 이 똑같은 것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직접 알아내기로 했다. 대체 왜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벗는 게 자유로워졌는지를. 섹스가 스포츠와 같다는 사고방식은 대체 어디서 왔는지를. 몇 시간동안 스웨덴 성문화와 나체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주제로 리서치에 몰두한 결과, 나는 이 두개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글 "스웨덴의 벗을 수 있는 자유" 링크: https://brunch.co.kr/@thegreenmuse/18)
그리고 나는 또다시 현생에 치여 살아가며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마커스에게서 인스타 디엠 한 통을 받았다.
“그린, 나 다다음주에 한국 놀러가. 너 그때 서울이면 얼굴 한번 보자!”
우리는 신촌의 돼지갈비 집에서 만났다. 마커스는 여전히 따뜻했고, 대화를 풍성하게 할 줄 알았다. 마커스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여자친구 에이미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고, 마커스만큼이나 따뜻했으나 장난기 가득한 마커스와는 다른 어른스러움이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내가 예전에 본 스웨덴 드라마 “러브 앤 아나키” 얘기를 꺼냈다.
“거기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너무 잘생겼어.. 유튜브 보면 나 뿐 아니고 한국에 걔 좋아하는 여자들 엄청엄청 많아.”
내가 잔뜩 들떠서 말하자, 에이미가 대답했다.
“Bjorn 말하는 거야? 그 사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야. 컴공 석사 따고 지금도 촬영 안할 때는 부동산 스타트업에서 일해.”
그 순간 나는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더 궁금해졌다. 연예인이 엔지니어로 일하는 나라라니. 그것도 데뷔를 한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고 있다고? 너무 신선하잖아?
EQ 천재인 마커스같은 남자들이 존재하는 나라, 라떼 파파들이 존재하는 나라, Bjorn과 같은 연예인들이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나라. 나는 갑자기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내 안에서 서서히 부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 눈이 반짝이는 걸 본 마커스는 나를 더 부추겼다.
“그린, 너가 만약 스웨덴에 온다면 에이미가 Bjorn을 소개해줄 수 있을지도? 스웨덴은 작은 나라여서 건너건너 수소문하면 만나볼 수 있을거야”
소올직히 그 말에 솔깃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에이미는 배우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Bjorn을 진짜 만날거라는 기대감보다도,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그저 너무너무 궁금했다.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음식은 어떤 맛이고 거리에선 어떤 냄새가 나는지. 한번 직접 가서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마커스를 다시 만나게된지 정확히 3개월 뒤인 2024년 6월,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스웨덴 스톡홀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