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와 함께하는 한 끼를 먹고 나면 한결같이 매번 하는 말이 있다. 10대 때도, 20대 때도, 30대인 지금도 엄마는 식사를 하고 나면 내게 말한다.
우리 딸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고마워!
‘엄마가 요리해서 엄마가 밥 차리고 엄마가 치우는데 왜 나한테 고맙다고 할까’라고만 나는 그저 생각했었다.
매번 당연하게 듣고 자란 말이라 그 특별함을 잘 몰랐는데, 이 말이 낯설게 들리기 시작한 건 내가 결혼을 한 뒤다. 밥을 한 끼 차린다는 건 보통의 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메인 요리로 찌개 하나만 끓이려 해도 채소를 다듬고 썰고 육수를 내고 끓이고 간을 맞추고 해서 겨우 한 끼를 먹는다. 그런 나와는 달리 엄마들은 한 번에 나물 두세 가지와 갈비찜, 찌개와 잡채 등 이 많은 음식들을 한 끼 식사에 차려 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자 신의 경지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반문했다.
“엄마가 혼자서 다 힘들여 차린 음식인데 왜 나한테 고맙다 하고 내 덕분에 잘 먹었다고 하는 거야?”라고.
“우리 딸이랑 같이 먹어서 엄마가 덕분에 맛있게 먹었잖아. 그러니 딸 덕이고 고마운 일이지.”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모두 내 덕이라고 했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고, 나에게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난지 3개월쯤 됐을 무렵 이제는 내가 그 말을 따라 한다. “우리 딸 덕분에 잘 먹었어, 고마워~” 3개월 아기는 심지어 밥을 같이 먹어 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나면 자연스레 말이 나온다. “우리 딸이 엄마 밥 먹으라고 혼자서 잠시나마 잘 놀아 준 덕분에 엄마가 밥을 잘 먹었어. 고마워.” 말 뜻은 모르겠지만 아이는 나를 보고 방긋 웃어 준다.
덕분에라는 말은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편 덕분에, 시어머니 덕분에, 할머니 덕분에, 팀장님 덕분에, 친구 덕분에, 아랫집 덕분에. 내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모두 주변 이들의 덕이란 그들의 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말 따나 아이를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주변 이의 도움이 필요한지 모른다. 층간소음이 신경 쓰여 많이 조심하려 애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울 텐데 너그러이 참아 넘겨주시며 "애들 키우는 집이 다 그렇지, 괜찮아요~ 허허헣" 하고 넘겨주시던 아랫집 어르신부터, 엘리베이터에서 유모차가 먼저 내릴 수 있도록 열림 버튼을 잡고 기다려주는 학생, 집 앞 마트에 가면 환하게 손녀를 맞이하듯 활짝 웃으며 '누구누구 왔어?' 하며 반겨주시는 아주머니까지. 아이가 지금껏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준 건 내가 아이를 잘 키워서도, 아이가 가진 긍정의 유전자 때문도 아닌 주변 이들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 덕임을 어찌 잊으랴.
이름도 모르고 지나치는 세상의 많은 이들 덕에 아이를 건강히 키우고 잘 살고 있다. 나도 그렇게 자라 왔을 거다. 엄마는 오늘도 함께 점심을 먹고 어김없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엄마의 밥상머리 교육은 별 다른 게 아니었다. 엄마의 말 한마디는 나의 존재, 별다른 거 없이 엄마의 앞에 마주 앉아 밥을 함께 먹는 나 자체로도 너는 소중한 내 딸이라는 문장을 대체한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울 엄마만큼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도저히 없지만, 어느새 엄마의 언어는 나를 거쳐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매사에 고맙다고 덕분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엄마의 언어는 알게 모르게 나를 이루는 자양분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방의 월세 방 한 칸에서 시작한 엄마, 아빠로부터 재산 한 푼 물려받는 거보다 더욱 큰, 차마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큰 유산을 물려받았다. 엄마의 언어가 쌓여 내 피와 살을 이루고, 삶을 살아 나가는 기본기가 된다.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서른한 살의 나는 여전히 엄마의 밥과 엄마의 말을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