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식상함의 변주

by 그림토끼

기묘한 시대, 책이라는 실체는 사라지는데 책을 둘러싼 환상만은 요란하다.


나 또한 다독가라는 환상에 젖어있는 사람으로써 폐부를 정확하게 찔렸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랫동안 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물론 현재까지도.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었던 그의 추리소설과 약간 결이 달랐는데 제목이 뭔가 단순해서 애초부터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작가의 이름이 있으니 관심은 있었다고 하자.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이라고 해서 추리소설일까 했지만 그런 이야기라기 보다 오히려 책과 글읽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역시 히가시노구나’ 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영리하고 재밌고 현명한 방법으로 업계를 조롱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가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히가시노의 팬이라기 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이다. 책 한권에 오로지 집중하기가 점점 어려운데 그나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추리소설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이 가진 속도감과 마지막까지 치닫는 긴장감 사이에서 독자와 밀당하는 반전을 늘 기대한다.

문체가 좋은 책들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겠지만 매달 책 할당을 채우지 못하고 바등거리는 나는 늘 독서권 수에 쫓기는 편이라 항상 빠르게 읽히는 추리소설을 찾는다.


그러나 한동안 히가시노의 책을 멀리했다. 그의 책이 잘 읽히기는 하지만 더이상 그의 이야기에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고 범인도 예상가능 했으며 소설이 지나치게 구조화 되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다작하는 작가로서 피할 수 없는 비난이지 않을까(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생각). 하가시노류의 장점이라면 그의 성실함 덕분에 읽어도 읽어도 늘 읽을거리가 풍부하다는 것과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어쨌든 완독과 최소 재미가 보장된다는 매력이 있다.


블랙쇼맨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호텔, 수상한 사람들, 연애의 행방, 붉은손가락, 옛날에 내가 죽은 집, 살인현장은 구름 위 등 내가 읽은 몇몇의 추리소설 중에서 이마를 탁치는 순간도 있었고 기대보다 시시했던 적도 있었지만 읽다가 중간에 버린 책은 없었다. 특히 나미야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이라기 보다 판타지에 가까웠지만 아직도 즐거웠던 독서경험으로 남아있다.


이번에 오랜만에 읽게 된 그의 책이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인데 제목마저 너무 식상하고 고루해서 굳이 읽을 욕심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던 날 책이라도 읽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였다.


첫 이야기에서 웅?? 살인은 언제 일어나는거지? 이사람이 범인인가? 추리소설에 목마른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살인사건에 대한 범인을 지목했다.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이 책을 완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에 발표한 단편들을 엮은 책이라는데 발표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이었을거란 생각도 했다.


추리소설 작가가 추리소설 작가를 주인공으로 소설 속에 소설을 쓰는 과정을 쫓아가다보면 글을 읽는 나도 작가와 함께 책을 출판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금을 줄이려고 억지로 소설에 이야기를 끼워맞추는 작가 이야기에는 살인은 없었고 현실문제와 타협하는 작가의 비겁한 삶이 보였다.

베셀작가에 대한 허상을 조롱하는 이야기가 몇편 있었는데 더이상 이야기가 없는 베셀 작가가 누가 범인인가를 놓고 퀴즈를 내거나 치매에 걸린 추리소설 작가에게라도 신간을 받아야만 하는 편집자들이나 범인을 어떻게 할지 몰라 본인의 죽음으로 마무리한 작가의 이야기에서 작가와 편집자와 관계가 보이기도 했다.

좋은 책을 출판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판매에만 욕심을 부리는 출판업계 현실을 꼬집기도 했는데 유행하는 트렌드나 경쟁 출판사의 홍보 방법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국 세상에 나온 책은 책이 가진 본질로의 회귀가 아니라 표지에 철판을 넣은 가장 무거운 책이라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이과계 살인사건은 범인을 밝혀내는 방식이 꽤 새로웠다.

알아서 글을 써주거나 글을 읽어주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는 sf소설 같았는데 예전만큼 글을 읽거나 쓰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요즘에 대한 쓴소리였다.

예고소설 살인사건이 마지막 반전까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가장 추리소설 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단편들이 모두 마지막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방식으로 마무리 되었고 이야기 안에서 살인이 벌어진 것은

2편정도인 것 같다. 혹시 내가 놓친 살인이 있나 싶어서 여러번 확인했지만 살인은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서는 왜 모든 이야기에서 살인이 있다고 한거지)

주인공들이 추리소설 작가이다보니 나는 모든 이야기가 혹은 어떤 이야기는 자전적이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 주인공이 바로 작가 자신일까.


출판업계에 대해 현실적이지만 불쾌하지 않게 심지어 작가다운 위트까지 틈틈이 채워 얘기하고 있어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진지하지도 않아서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이 사람은 30년 넘게 글을 써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바닥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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