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완열 Jan 18. 2022

사실은 샐러리맨 이야기, 중력

훔치고 싶은 문장이 있는 소설

  한국 최초의 우주인 선발 프로젝트가 있었다. 최초로 선발되었던 고산씨가 모종의 이유로 탈락하고 후보였던 이소연씨가 선발되어 한국 최초로 우주인이 되었다. 기태 작가는 취재기자였다. 선발에서 떨어졌던 고산후보를 취재하며 이 소설에 대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한국인 최초 우주인 선발'이라는 독특한 소재만큼이나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려한 문체와 내정치에서 벌어지는 밀한 심리묘사다.


특히 첫 장에서 시작는 ‘저녁의 시간’에 대한 묘사는 읽는 내내 황홀 지경이다. 작가는 무려 36번의 수정 끝에 퇴고를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소설의 플롯보다 첫 장의 묘사에서 모든 힘을 쏟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부분만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저녁이 찾아오는 고즈넉한 시간을 사랑한다. 대낮에는 구름이 물결처럼 밀려오거나 목화솜처럼 피어나거나 설산처럼 솟구친다. 하지만 고요한 해거름이 다가오면 가만히 멈춘 듯이 보인다. 그리고 가끔 그 바닥은 두두룩한 두둑과 고불고불한 골이 생겨서 하루의 마지막 볕을 받을 채비를 한다. 서쪽 능선 너머로 가라앉던 햇발을 받고 보다 높은 구름은 부푼 듯이 투명해지고 보다 낮은 구름은 어두운 연기처럼 가라앉는다. 이럴 때의 고요한 하늘은 지구라는 생명이 명상에 잠겨 든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어서 해를 둘러싼 구름과 공기가 날달걀인 듯이 부드럽게 풀리다가 황혼이 석류처럼 불그스레 번져간다. 그리고 색채들이 고요한 대기에 거무스름한 잿빛으로 잦아들면 땅거미 지는 어스름 녘의 풍경이 나를 감싸는 것이다.

-소설 '중력'에서 발췌-


목화솜, 두두룩한 두둑, 고불고불, 구름과 공기가 날달걀인 듯이 부드럽게 풀리다, 풍경이 나를 감싸다. 대체 이런 표현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심지어 두두룩과 고불고불이라는 표현은 생전 처음 들어보았다. 풍경이 나를 감싸고 있다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다. 김영하 작가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압도되었다.


승진을 향한 치열한 알력 다툼, 사내정치에 휘말린 주인공의 심리묘사도 흥미롭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 다닐 때 너는 승진이니 미리 알고 있으라고 귀띔받은 간부들은 마음이 어땠을까? 비밀을 함께 지니는 일은 아웃사이더를 갈라낸다. 모를수록 밀려나고 미끄러지고, 내가 맨 나중 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런 비밀을 누군가에게 나직하게 말해주다 보니 슬그머니 나를 얕잡아보던 상대의 비웃음이 기억난다...... 그걸 이제 알며 어떡해? 이런 일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

-소설'중력'에서 발췌-


주인공우주인 내정 통보를 받고 팀원들에게 미안해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주인공은 연구원 출신 일반인 후보) 소설을 읽는 것은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한다데, 정말이지 그렇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계 시간에 공문을 통해서 승진 명단을 공개한다. 그런데 사실 비공식적으로 발표 전에 전화가 온다. 공문에서 내 이름을 는 것은 이미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이나 내 이름을 공문에서 찾아야 했다. 아니, 내가 떨어졌음을 알면서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화살처럼 꽂히는 기분이 들어서 방도 내팽겨치고 사무실에서 도망다. 삼수 끝에 간신히 승진 을 때 비로소 사전 통보가 사실임을 알았다.


소설'중력'은 한국 최초 우주인 유력 후보가 왜 탈락했는지 그럴듯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샐러리맨인 내 이야기와 닮았다. '저녁의 시간'에 대한 묘사도 정말 좋았다. 지금도 가끔씩 낮과 저녁의 경계에서 그 문장을 음미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신론자가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