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한 번쯤은 축 처진 등을 토닥토닥 데우는 따뜻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 시간째 멍하니 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선량한 책상에 머리를 콩콩 찧고 있다. 젠장. 단단하다 믿어왔던 머리에 슬슬 통증이 느껴졌다. 이거 참 안 되겠군. 문득 내 따스한 진심을 우회적으로나마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절박한 기분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연락한 지 한참 된 다섯 명의 지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난 지금, 딱 한 명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굉장히 허탈했다. ‘내겐 소소한 안부마저 전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건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여린 마음에 상처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길로 이 글은 깔끔히 포기하고 접으려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엊그제 한 친구가 연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20년 지기 벗들이 모인 카톡방에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워낙 많은 추억을 쌓은 막역한 친구들이기에 위로 한마디 나올 법했지만, 가여운 새끼 톰슨가젤을 둘러싼 표독스런 하이에나 떼와 다름없이 합심해서 녀석을 마구 놀려대기 시작했다(물론 저도 안 그랬다고는 말 못 해요).
그 친구를 만났다. 나를 포함해 짐승 같은 놈들 몇과 함께였다. 막상 직접 들어보니 참으로 가슴 시린 절절한 사연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한 고독한 사나이의 상처가 매우 깊고 커 보였다. 하지만 눈물 섞인 하소연을 들어주던 우리는 위로는커녕, 역시나 맹렬한 기세로 조롱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날 밤, 나는 술에 떡이 된 녀석을 들춰 업고 집까지 데려줘야만 했다(심지어 택시 값도 내가 냈다).
이런 뜬금없는 자기 고백은 글의 전개에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 있으나, 내게도 인생에서 정말로 아프고 힘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몸과 정신의 구석구석이 뒤엉킬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흔들림과 깨짐과 방황과 절망은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거친 세상을 마주하며 ‘나는 강하다’고 인식해야 할 때가 있다. 문자 그대로 반드시 강할 필요는 없으나, 스스로 강인하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쉽게 넘어지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필사적으로 길을 찾고자 분투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히 상처 입고, 헐떡이며, 헤맨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크리스탈이 깨지기 쉬운 건, 약점이 아니라 품격이다.’
때론 흔들리고 쓰러지는 건, 단지 연약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깨짐이 우리네 삶의 품격을 증명하는 단면일지도. 깨지기 쉬운 만큼 소중히 다뤄야 하니까. 삶에는 또한 그 나름의 치유 기능이 있기에 힘겹게 노력하고, 끊임없이 깨지며, 마침내 버티고, 결국에는 살아내는 것 자체가 소중한 존재로 다듬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라도 간절히 믿고 싶다.
그러니 너절해진 무릎에 다시 힘을 줘, 고된 세상을 헤치며 걸어가요. 수면에 이는 물결이 잠시 일렁이고 사라지듯, 잠깐 흔들리고 이번에도 이겨내요. 나도 당신도 말이에요.
내 한심한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건 진심이다.
* '크리스탈이 깨지기 쉬운 건, 약점이 아니라 품격이다'는 말은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에서 스쳐 지나간 대사를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