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지워가며
"푸핫, 찐한 아이라이너랑 귀걸이가 뭐 대수라고.."
회사 관두면 눈 화장 진하게 하고 큰 귀걸이 달고, 딴 사람인 것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더니 후배가 비웃으며 한 말이다.
맞다. 눈 화장과 귀걸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소망 또는 로망 일리가. 당장 거울보고 쓱싹하면 되는 것을....
그러나 나는 긴 세월 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학교 때 귀걸이 했다고 선배들한테 혼난 적이 있다.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다. 첫 사회생활을 했던 시기와 회사 분위기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여자'임을 드러내는 걸 억누르는 분위기였다. 화장도, 액세서리도, 화려한 색의 옷차림도 주의받았다. 남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조금만 튀는 색깔의 남방, 넥타이만 착용해도 한 마디씩 듣기 일쑤였다. 개인보다 조직이 두드러져야 한다고 믿는, '암흑의 시대'였다.
25년 회사의 시간은 나를 '무채색 인간'으로 만들었다. 옷장 안에는 검은색, 남색, 베이지색 정도의 옷만 가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접하면, "나는 ~~~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직업을 대답하는 것 말고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를 관두는 시점을 고민하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숨이 탁 막혔다. 주변 직장인들 대부분이 검은색 옷차림이었다. 그때가 겨울인지라 더했던 것 같다. 검은색 패딩, 검은색 코트, 회색 점퍼, 검은색 구두.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프레임 안에 함께 있는 A와 B의 자리를 바꾼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오래 버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늙기 전에 다른 색들도 알고 싶다'
여름에 회사를 관두자마자 개인에게 맞는 색상을 찾아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홍대 부근으로 찾아갔다. 민낯에 여러 색깔의 천을 갖다 댄 뒤 나는 '가을 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게 어울리는 색상을 담은 카드를 보니 내가 좋아한 색도 있었다. 이름이 틸 블루였다.
"음.. 지금 입으신 빨간 재킷은 안 맞으세요. 그리고 검은색도 별로예요" 내가 걸친 모든 것이 나와 상극인 색들이었다. '퍼스널 컬러'가 무조건 맞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색을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나와 어울리는 색을 찾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가을 딥 카드에 있는 색상의 옷을 찾다가 우리나라 기성복들의 색감이 얼마나 단조로운지도 알게 됐다. 유럽 spa 브랜드 판매점에 가야 총천연색의 옷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귀를 뚫어볼까. 몇 년 전만 해도 거리를 다니다 보면 '귀 뚫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내건 액세서리점들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의료법 위반으로 함부로 가게에서 뚫으면 처벌을 받게 됐단다. 결국 예전에 뚫은 자리가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재도전에 성공했다. 짓무르고 염증이 생겨도 소염제를 복용해가며 한여름을 넘겼다.
겨우 귀걸이에 도전한 시기에 딸은 귀에 피어싱을 여러 개 했다. 저만큼 앞서 가버렸다. 그리고 이제 내가 '피어싱 하면 피부 상하지 않냐'라는 잔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참아냈다.
화장하는 법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유튜브를 통해 요즘 메이크업을 눈팅했다. 이름난 뷰티 유튜버들의 화장은 이쁘기는 하지만 따라 하기엔 어려웠다. 화장 단계도 복잡하고 20대 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딸한테 겨우 아이라인 번지지 않게 그리는 법이나 도구를 소개받았다. 문제는 내 눈이 아이라이너가 잘 번지고 아이섀도를 해도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것. 아직까지 내게 맞는 화장법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귀걸이보다 화장이 더 장벽이 높다. 화장을 평소보다 진하게 하면 괜히 눈치 보인다.
그래도 눈 화장을 잘하고, 잘 어울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자잘한 눈가 주름에도 컬러풀한 눈화장과 어울리는 립스틱을 바르고 싶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외적 스타일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수록 겉모습이 내면까지 좌우하는 걸 느낀다. 지극히 무난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면 편하긴 하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생 배경으로만 살면 좀 억울하지 않나.
내 모습과 목소리를 주저하지 않고 드러낸다고 큰일 나겠는가.
"나는 파란색 옷을 좋아하고, 나무 팔찌를 좋아해요. 드럼 소리를 들으면 빨리 걷고 싶고, 조폭 영화는 그만 보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의 농담은 하나도 웃기지 않고 듣기 괴로워요"
나이 들어서도 세상이 원하는(?) 소리에 맞춰가며 정물화 같은 할머니로만 살아갈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