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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온도, 관계의 온도.

by 볕뉘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몇 번이나 다시 본다. 이토록 한 작품에 마음이 끌리는 까닭은 아마도 부러움 때문이다. 한 사람을 원 없이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 그 뜨거움과 절망, 그리고 용기가 화면 가득 살아 숨 쉬고 있어서다. 주인공들이 서로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그 격렬한 우정과 증오가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로 빛나며 내 마음을 흔든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한 사람을 저렇게 원 없이 사랑하고, 또 미워해 본 적이 있었을까?” 돌아보면 내 인간관계의 풍경은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웃으며, 적당히 마음을 내어주는 자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창 시절에도 어느 한 사람과 깊게 엮이기보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관계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가 두려워, 늘 안전한 길을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만큼 누군가의 심연에 끝까지 닿아 본 경험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 인생의 나의 아저씨’라 부를 만큼 평생을 함께 울고 웃을 존재를 곁에 두고 산다. 화면 속 은중과 상연의 표정과 대사가, 나를 무채색 현실에서 흔들어 깨웠다.

드라마를 볼 때마다 때론 은중이 되기도 하고, 때론 상연이 되기도 하는 나 자신을 본다. 그 균형을 끝없이 시험하는 내 모습이 피곤하면서도, 결국엔 늘 안정된 쪽을 택하려 한다는 것도. 한쪽이 더 많이 주면 다른 쪽은 더 많이 빼앗고, 한쪽이 물러서면 다른 쪽은 한 발 더 다가온다. 겉으로는 불균형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의 빛과 그림자를 나눠 가진 묘한 균형. 낮과 밤이 밀고 당기듯, 그들은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끝내 진짜 자신에게 닿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관계는 절기의 추분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낮이 밤에게 절반을 내어주는 날 추분. 그 균형의 한가운데 서면 계절이 잠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의 뜨거운 숨결이 미련을 남기고, 가을의 차분한 공기가 그것을 조용히 받아낸다. 우리도 관계 속에서 어느 순간 균형을 찾는다.

내 삶을 돌아보면, 늘 낮 쪽에 서 있었다. 밝고, 안전하고, 명확한 것만 선택했다. 하지만 추분이 가르쳐 주는 것은 빛과 어둠이 함께 있어야 세상이 온전해진다는 사실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려면 그만큼의 미움과 실망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두려워 한발 물러서면 따뜻함과 깊이도 함께 잃는다.

추분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너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남길 것이냐.” 관계에서 너무 많이 내어주면 지치고, 너무 많이 움켜쥐면 메마른다. 은중과 상연의 관계가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그들이 이 균형의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관계의 진짜 깊이는 ‘적당한 안전함’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상대의 밑바닥까지 마주하고서도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비로소 한 사람을 온전히 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낮이 밤에게 절반을 내어주듯, 나 또한 내 마음의 절반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상대의 그림자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은중과 상연〉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울림은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일은 추분의 절기처럼 빛과 그림자를 함께 감싸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낮과 밤이 평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듯, 우리도 서로의 낮과 밤을 존중하고 서로의 아픔까지 받아들일 때 비로소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관계 속에서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마음의 문을 열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그림자까지 함께 품으며 관계를 맺을 것이다. 우정이라는 삶의 온도와 관계의 온도를 이 드라마가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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