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좋아서.
책이 뭐라고, 책이 왜 이렇게 좋을까.
삶의 속도는 늘 읽는 속도를 앞질러 달려가지만, 그럼에도 책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몽글몽글 부풀어 오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린 시절 오래된 편지를 열어보는 듯 설렘이 일어나고, 알 수 없는 힘이 세상과 연결해 준다.
어쩌면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계절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크고 깊어 어디서든 나를 위로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빛으로 물든 길을 걷다 보면 골목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인연처럼 가을빛 속에서도 또 어떤 사람이,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책과 사람과 계절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이어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책이란 사람을 만나게 하는 다리이고, 마음을 건너게 하는 작은 배 같다. 페이지마다 놓인 단어들이 다리의 발판이 되고, 문장마다 스며든 숨결이 작은 노가 되어 마음을 건너게 한다. 책과 함께라면 잠시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책 속의 온기와 향기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산책길마다 단풍은 한 겹씩 물결처럼 스며들고, 골목마다 번지는 빛의 결은 오래된 숨결처럼 느린 호흡으로 발걸음을 품는다. 그 풍경 속에서 책을 펼치고 사람이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은 마치 계절이 한 권의 책이 되는 듯한 장면이 된다. 가을이 우리에게 속삭이듯 책도 우리에게 속삭인다. 천천히 읽어도 괜찮다, 멈춰도 괜찮다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을 건너는 일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읽고 쓰는 행위는 서로의 시간과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여행이다. 그 두 가지가 교차하는 자리에 책과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들을 수 있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서점이 인생의 다정함을 안겨 주듯, 책도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발걸음을 바꾸고, 인생의 페이지를 바꿀 수 있도록 바람을 일으켜 준다.
책은 우리 안에 갇혀 있던 기억의 빛을 꺼내어 계절처럼 펼쳐놓는다. 여름의 격정, 봄의 설렘, 겨울의 고요, 그리고 가을의 성찰이 페이지마다 내려앉는다. 문장을 읽으며 마음의 기온이 바뀌고, 문장을 쓰며 내 안의 바람이 달라진다. 책은 결국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하고, 그 발견 속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이렇듯 책이 남겨주는 가장 큰 선물은 지식을 넘어 자신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조용한 나침반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목소리를 듣고, 마음의 온도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책과 계절과 사람은 닮아 있다. 계절이 우리에게 자연을 선물해 주듯 책도 우리에게 문장을 건네고, 사람도 우리에게 마음을 건넨다. 그 건네짐 속에서 우리는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책이 좋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계절을 품는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펼친다. 계절은 흘러가도 문장은 남고, 길은 달라져도 마음의 지도는 계속 그려진다. 그리고 그 문장을 통해, 그 페이지를 통해, 나는 조금 더 너에게, 조금 더 나에게 닿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