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절인연

시절인연이 건네는 마음

by 볕뉘

살다 보면 참 많은 인연이 스쳐 간다. 어린 시절 매일같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친구, 한 계절을 함께 웃고 울며 버티던 동료, 잠시 같은 꿈을 꾸다 각자의 길로 흩어진 사람들까지. 그들은 길고 짧은 시간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가,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흘러간 관계들을 우리는 시절인연이라 부른다.

특정한 시절에만 머물고 그 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떠나는 인연이라는 뜻이다.


시절인연의 아름다움은 그 유한성에 있다. 영원히 푸를 것 같던 여름의 나무가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 듯, 만남도 끝을 향해 흐른다. 그래서일까, 끝이 있기에 순간의 찬란함은 더욱 눈부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빛을 붙잡듯, 우리는 스쳐 간 인연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배운다.


학창 시절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가 유난히 그리운 까닭은, 그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밤늦도록 어깨를 맞대며 고생했던 동료의 이름을 지금은 부르지 않더라도, 그때 마음을 붙잡아 주던 힘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짧게 스쳐 간 인연일수록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 안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이 새겨 넣은 진심이 새겨져 있어서가 아닐까? 몇 마디의 웃음, 작은 격려, 잠깐의 온기가 긴 시간의 흔적이 마음을 간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그렇게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끝난 인연 앞에서 아쉬움만을 붙잡기보다는, 그 시간이 내게 건네준 선물로 기억하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인연이 남기고 간 흔적은 결국 내 삶의 디딤돌이 되어준다.

살아가며 우리는 종종 묻는다. "왜 그렇게 소중한 사람과 멀어졌을까?" 하지만 곱씹어 보면, 멀어진 것이 잘못은 아니다. 봄꽃이 지고 나서야 여름의 녹음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관계가 끝나야 또 다른 만남이 시작된다.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그때 그 사람이 내 삶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시절인연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남은 또 하나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건넨다. 인연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오래 머무르지 않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환히 밝혀 준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떠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흘러가야 할 인연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야 할 순간을 담담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마음을 다하는 일이다. 내일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오늘의 다정함이 곧 내일의 추억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유한한 인연 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따스한 흔적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돌아보면 시절인연은 모두 나를 자라게 했다. 어떤 이는 웃음을 남기고, 어떤 이는 눈물을 남겼지만, 그 모든 흔적이 지금의 나를 빚어 주었다. 그러니 우리는 지나간 인연을 원망하기보다 감사히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다시 스칠 수도 있고,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그 시절 그 인연이 있었기에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삶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모든 인연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고, 모든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웃음을 건네고, 다정함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절인연은 언젠가 흩어지지만, 그 순간을 빛나게 했던 온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 스쳐 지나간 시간조차 결국 우리를 지탱하는 따스한 흔적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삶의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8화책이란 계절을 건너는 다리.